[글로벌 아이] “말은 싸구려일 뿐”
지난주 워싱턴 주미 대만대표부가 주최한 건국기념일 행사를 다녀왔다. 공원만큼 넓은 마당에 큰 나무 두 그루가 서 있어 트윈 오크스, 쌍상원(雙橡園)이라 불리는 고택에서 행사가 열렸다. 1937년부터 40년간 중화민국의 대사관저였지만, 미국과 국교 단절 후 내려진 대만 국기가 다시 걸린 지는 채 10년도 안 됐다.
이날 초대된 미 의회와 각국 대사관 인사들 앞에 선 샤오메이친 대표의 연설은 사뭇 비장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를 둘러싼) 위협과 괴롭힘은 더 커졌다. 우리는 굴복도 않겠지만 도발도 않을 것이다. 대만이 안정돼야 국제사회도 안정된다.”
이어 연단에 오른 마이클 매컬 하원 외교위원장은 화답하듯 “대만을 보호하는 게 미 국가 안보와 경제이익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대만을 사랑한다”는 말도 영어와 중국어로 번갈아 외쳤다.
이런 제스처가 유독 과장되게 느껴진 것은 바로 직전 미 의회에서 일어난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 해임 때문이다. 공화당 강경파 등쌀에 임시예산안에서 우크라이나 지원 부분은 쏙 빠졌고, 미국 서열 3위인 하원의장도 물러났다. 고립주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뉴욕타임스 표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지원 반대는 “공화당의 표준”이 됐다. 이제 대통령이 아무리 “중단 없는 지원”을 강조해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없다.
이날 행사장에서 만난 한 대만계 인사는 이런 일이 “대만인의 믿음을 흔들어놨다”고 했다. 중국이 대만을 쳐들어와도 초반만 잘 버티면 물리칠 수 있을 거라 봤는데, 애물단지처럼 된 우크라이나가 생각을 바꿔놨다는 것이다.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이를 두고 “말은 싸구려일 뿐(Talk is cheap)”이라고 냉소적으로 분석했다. “지금은 초당파적으로 중국에 적대감을 표하고 있지만, 의회가 엉망인 상황에서 대만은 몇 가지 보장에 너무 의존해선 안 된다”(더글러스 팔 전 대만 미국대표부 대표)는 조언도 전했다.
한·미 간에도 정상회담과 캠프 데이비드 회동을 통해 많은 선언문과 합의가 나왔다. 두 나라 모두 스스로 후한 평가를 하고 있지만, 당장 미 의회나 내년 대선 이후 백악관에선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른다.
지난 4일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CCGA)가 공개한 여론조사에서 북한이 한국을 침공할 경우 미군 파병 여부를 묻는 말에 찬성 응답은 50%에 그쳤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63%였다. 말의 값을 너무 비싸게만 믿고 있다가는, 지금 대만이 느끼는 두려움은 언제든 우리 몫이 될 수 있다.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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