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혜의 미술로 한걸음] 고구려 평양성 석편이 맺어준 인연
고구려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후, 성벽 축조는 누대에 걸친 대규모 국책사업이었다. 6세기 양원왕과 평원왕 때 현재 평양의 중심부와 일치하는 평양성의 모체가 거의 완성됐다. 그런데 이 성벽을 만들 때, 구역별 담당 감독관이 자기 이름과 직함을 돌에 새겨 넣는 관례가 있었나 보다. “여기서부터 동쪽 12리를 무슨 직위를 가진 아무개가 축조했다”라는 식의 내용이 적힌 돌덩어리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성벽 돌에 한자로 새긴 이 기록물은 지금까지 총 6개가 발견됐는데, 그나마 탁본만 있고 석편 실물이 전하는 것은 3개뿐이다. 그중 2개는 북한에 있고, 남한에는 딱 1개가 이화여대박물관에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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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경석이 구한 고구려 성벽 돌
부친 뜻 이어 아들 세창이 보존
전형필의 ‘문화재 스승’ 오세창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의 감동
」
이 보물을 처음 손에 넣은 이는 오경석(1831~1879)이었다. 사실 이런 식의 돌덩어리가 조선 천지에 한둘이 아니었겠지만, ‘문자가 새겨진 돌’을 귀히 여긴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금석문(金石文)’, 즉 ‘쇠와 돌에 새긴 글’을 모으고 분석해 역사적 사료로 가치를 찾는 작업은 청대 실증주의 영향으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겨우 본격화한 일이다. 그런데 김정희가 ‘세한도’까지 줬던 그의 제자 이상적(1804~1865)의 수제자가 바로 오경석이었다.
그러니 오경석도 돌아다니는 돌덩이를 함부로 여기지 않고, 잘 모아서 기록하고 중국의 학자들과도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오경석은 이 석편을 1855년 “평양부치(平壤府治) 서쪽 10리 지점인 오탄강변의 한사정(閑似亭)에서 보고 한양에 가져왔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는 이 석편의 탁본을 여러 점 떠서, 자신도 스크랩하고 중국에도 보낸 모양이다.
개화파 3대 비조(鼻祖)였던 오경석이 제대로 꿈을 펼치지 못하고 48세에 생을 마감하자, 그의 아들 위창 오세창(1864~1953)이 부친의 뜻을 이었다. 오세창은 부친이 평생 사비를 털어 모은 어마어마한 양의 중국과 조선의 서적과 유물을 보고 자라며,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감식안을 지닌 문예계 ‘지존’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애국계몽운동사에도 3·1운동사에도 등장하지만, 대중에게는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스승으로 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전형필이 스승 오세창과 처음 만났던 장면에 바로 이 평양성 석편 탁본 이야기가 등장한다. 원래 전형필과 오세창은 나이 차가 많았다. 1928년, 아직 와세다대 법학부 학생이던 22세의 전형필이 노년의 오세창을 처음 찾아갔을 때의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귀한 전적과 서화들을 지키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하니, 앞으로 어르신의 지도를 구하고자 합니다.”
처음에 오세창은 이 어려운 과제를 짊어지겠다는 젊은이의 의지에 반신반의했다. 이때 오세창 앞에 전형필이 조심스럽게 내민 물건이 이 고구려 평양성 석편 탁본이었다. 그것도 오세창의 부친 오경석의 인장이 찍혀 있고, 그가 직접 탁본했다는 문구가 쓰여 있는 버전이었다. 중국에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조선에 들어온 이 탁본을 전형필이 전동(현 인사동)에서 구해 가져온 것이다.
오세창은 돌아가신 부친의 자취가 묻어있는 석각 탁본을 보고 감격했다. 그리고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석편 실물을 꺼내왔다. 이 실물을 오세창이 직접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번에는 전형필이 놀랐다.
그런데 이 석편 실물은 그사이 오세창이 풍운의 세월을 겪던 일본 망명 시절, 집안에서 급히 이사하다가 깨뜨려 두 동강이 나 있었다. 글씨의 두 번째 줄 부분도 사라진 후였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석편이 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니, 온전한 석편일 때 부친이 직접 만들어 중국에 보낸 탁본이 더욱 반가웠을 것이다. 오세창은 전형필에게 즉석에서 간송(澗松, 산골짜기 물과 푸른 소나무)이라는 호를 주었고, 이후 그의 스승이 되어 간송의 문화재 수집과 감정을 도왔다.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에 오세창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오경석의 인장이 찍힌 버전은 아니지만, 이 고구려 평양성 석편 탁본도 나와 있다고 해서 가보았다. 조그맣고 시커먼 탁본 하나 보러 갔지만, 전시실에는 더 훌륭한 작품이 많이 나와 있었다. 하나하나 절절한 사연을 품은 유물이었다. 풍전등화 같은 개화기에 누구보다 세계정세에 밝았으나 제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던 선각자들. 이들이 우리 고유의 역사와 기록을 발굴하고 보존하고자 했던 누대에 걸친 노력이 켜켜이 묻어있었다. 이 짧은 글에 적힌 선조들 이름이 모두 전시장 여기저기 등장한다.
이런저런 사연을 다 알고 전시를 보면 더 좋겠지만, 몰라도 괜찮다. 오세창의 전서(篆書) 병풍은 지금의 우리에겐 그저 외계어같이 보일지 몰라도, 그 자체로 정말 아름답다. 전시장에는 외국인 대여섯이 오세창의 병풍 앞에서 ‘뷰티풀’을 연발하며,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김인혜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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