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슬의 숫자읽기] 멍게 주도 성장
멍게는 옅은 바다에 사는 ‘동물’이다. 바위에 붙어사는 삶의 양태만 보면 동물이 맞느냐는 의심이 들겠으나, 엄연히 증거도 있다. 어린 시절의 멍게는 두뇌와 지느러미, 눈과 꼬리를 갖추고 넓은 바다를 헤엄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헤엄이 멈추는 건 바위에 닻을 내린 다음이다. 더는 쓸모가 없어진 사지를 퇴화시킨 다음, 멍게는 자기의 뇌까지도 소화해 식물과 같은 삶으로 침잠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바위틈에 붙어 여생을 보내다, 결국 누군가의 술상에 안줏거리로 오르는 게 멍게의 장례다. 뇌를 헐어 쓴 시점에 예비된 운명의 죽음이다.
멍게 철이 지나버린 요즈음엔 취객들의 술상에 노벨상 소식이 대신 오른다. 늘 후보로 거론되던 고은 시인의 추잡한 실각 이후 김이 새긴 했지만,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열망은 여전해서다. 그런데 노벨상급 학자를 양성할 연구 토대가 크게 무너졌다는 건 그만큼 입길에 오르지 않아 무척 아쉽다. 올해는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전년 대비 삭감된 지극히 이례적인 해이기 때문이다.
1997년 이후 현재까지의 연구개발 예산 추이를 살폈을 때, 주요국이 전년 대비 국가 연구개발 예산을 삭감한 예는 손에 꼽는다. 가령 세계 R&D 예산 1위인 미국은 해당 기간 중 오직 두 차례만 관련 예산이 전년도보다 줄었다. 이라크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2002년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직후인 2009년이다.
일본도 아베노믹스 말엽의 경기침체로 인해 두 차례 연구개발 예산을 축소한 게 전부이니, 이런 사태를 직접 겪지 않은 독일과 중국은 아예 연구개발 예산을 전년 대비 줄여본 역사 자체가 없다. 즉, 극단적 상황만 아니라면 국가는 자신의 두뇌를 지탱하는 R&D 예산을 함부로 헐어 쓰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토록 연구개발 예산을 지키려는 이유는 간명하다. 현대엔 기술 발전이 국가의 산업 역량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이 기술 투자를 통해 산업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산업에서 벌어온 돈을 연구개발에 재투자해, 경제 개발의 선순환을 만드는 방식을 ‘연구개발 주도 성장’이라 부른다. 공교롭게도 그 모델의 가장 성공적 예시가 우리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비합리적 이유로 연구개발 예산을 크게 삭감하는 건, 우리도 유생(幼生) 시절의 부단함을 버리고 뿌리 내린 멍게처럼 살겠다는 ‘멍게 주도 성장’으로 전환하자는 의미일까. 돈이 없어도 어찌 그 돈까지 줄이나.
멍게가 뇌를 잃고도 삶을 잇는 건 양분인 플랑크톤이 바닷물을 타고 스스로 제 뱃속에 들어와서다. 거의 바닷속의 산유국이다. 그렇지만 석유 없이 뇌만 있는 우리나라는 결국 R&D로 먹고 살아야만 한다. 일단 삭감된 R&D 예산 복구부터라도 시작해보자.
박한슬 약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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