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불행을 예습하지 말자
불행을 예습하지 말자
‘헤어지자’는 말을 자주 듣다 보면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이별에 대비하게 된다. 내가 아쉬워 붙잡은 경우에도, 모든 갈등을 극복한 이후에도 그렇다. 실제로 헤어진 적은 없어도 헤어지자는 말은 헤어짐과 비슷한 위력으로 타격을 준다. 쓸어도 쓸어도 나오는 유리 조각처럼 모든 게 괜찮아진 것 같은 순간에 미려한 잔해는 무방비한 살갗을 뚫고 찌른다. 이 영롱한 작은 파편들은 내가 떠나야 기어이 사라지겠지.
말조심은 전 지구적 통념이지만, 실제로 말에는 생각보다 큰 힘이 있다. 사실 세상은 비어 있다. 삶의 대부분은 허구로 이뤄져 있다. 당신은 당신이 당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누군가가 글자를 골라 정성스롭게 지어준 이름, 등본에 찍힌 여러 자리의 숫자 혹은 몇백 혹은 몇만 팔로어의 인스타그램 아이디로? 당신의 유일한 코드인 유전자조차 어마어마한 수의 선조들 유전자를 이리저리 짜깁기한 또 다른 버전일 뿐이다.
그러다 우리는 약속했다. ‘당신을 아무개라고 하자고. 언어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었을 세계를 얼기설기 엮어주는 얇고 투명한 약속이다. 사실 ‘사귀자’라는 말은 상호 간에만 유효한 구두 약속이지 실체는 없다. ‘헤어지자’는 파기 선언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야속하게도 머리카락 한 올과 손톱 끝까지 변함없이 그대로다. 그러나 우리는 그로 인해 참으로 쉽게 파괴된다.
생존을 목표로 진화해 온 탓에 인간의 오감은 나쁜 상황을 더 기민하게 감지하고 파악하게 됐다고 한다. 행복에는 둔감해도 된다. 그건 목숨을 부지하고 유전자를 전파하는 데 필수 요소는 아니니까. 하지만 뭔가 잘못될 것 같다는 예감은 무시하지 않는 편이 좋다. 우리는 생존이라는 희박한 확률 게임에서 살아남은 호모사피엔스 후손이다. 불행을 향한 특출 난 센서는 갈고닦여 우리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이 센서를 작동시키는 가장 직접적인 버튼은 바로 ‘언어’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던지고 있는.
인류의 전달 체계는 절대적으로 언어에 의존한다. 그래서 우리는 말로 전하고, 그 말이 전한 불행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것이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이가 남긴 댓글 하나로 공황장애가 올 수 있고, 스쳐 지나간 그의 의도조차 불명확한 한 마디로 우울증이 올 수 있는 이유다. 말의 힘은 스스로를 향할 때 가장 강력하다. 발화자와 대상자가 모두 나인 경우, 그러니까 자신에게 하는 혼잣말, 내적 속삭임의 영향력이 가장 지극하다는 뜻이다. 내벽에서 스스로 울린 종은 밖으로 소리를 내치지 못하고 공명에 공명을 거듭하며 더 크게 왕왕거린다. 그런데 그 파동이 부정적인 에너지를 담고 있다면? 줄에 매달린 돌을 점점 더 세게 쳐내다 결국 자신의 머리를 깨어버리는 곰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해치다 우리가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무언가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불행의 정도를 조절하려면 말을 제어해야 한다. 유일한 소통수단인 말을, 언어를 제어해야 타자와의 관계는 물론 나와의 관계도 제어할 수 있다.그런데 우리는 스스로에게 제일 야박하다. 겸손이 최고 미덕 중 하나인 유교 문화의 잔재 때문인지 우리는 스스로를 낮추는 데 습관이 돼 있다. ‘내가 무슨’ ‘이 나이에’ ‘나는 …해서 안 돼’ ‘늦었어’라는 말이 안개처럼 스스로를 휘감고 있다. 심지어 누군가가 칭찬해 줘도 가장 먼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감사합니다’ 대신 ‘아니에요’라는 부정의 말이니.
불행을 예비 연습하지 말자. 말은 상황을 만들거나 상황을 가정해서 간접체험을 하게 만든다. 헤어지자는 말이 매번 작은 헤어짐을 체험하게 하는 것처럼 부정의 언어는 세트장 위에 오른 뇌가 불행을 리허설하게 한다. 그 세트장의 장치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내 인생의 본무대가 밝고 크게 빛나려면 끊임없이, 특히 스스로에게 좋은 말을 해줘야 한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또 하면 되지’ ‘이렇게 배워가는 거야’ ‘지금부터 하면 돼’ 같은 말을 말이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정한 말로 행복을 연습해야 한다. 그 따뜻한 말이 외부의
온갖 불행에 대항하는 창과 방패가 돼줄 것이다. 기억하라! 당신은 괜찮다. 당신은 잘하고 있다. 당신은 더 좋아질 것이다.
에리카
여성 전용 헬스장 ‘샤크짐’ 공동대표. 사무직 직장인으로 살다가 30대에 완전한 ‘운동인’으로 각성했다. 더 많은 여자가 운동해야 한다는 믿음하에 〈떼인 근력 찾아드립니다〉를 펴냈다. 역시나 여성 전용 바 ‘에리카’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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