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지상주의 결함, 인간·자연 갈라놓았다

김남중 2023. 10. 1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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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자연에 이름 붙이기
캐럴 계숙 윤 지음, 정지인 옮김
윌북, 440쪽, 2만2000원
대체로 큰 새라고들 하는 '화식조'로 일부 뉴기니 사람들은 이 새를 포유류로 여긴다. 윌북 제공


2021년 말 국내 번역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례적인 베스트셀러였다. 생물학을 다룬 책인데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랐고, 과학책 분야에서는 지난해 내내 1위 자리를 지켰다. 저자 룰루 밀러가 책을 쓰면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 책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논의한 과학적 주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긴 분이라면, 직관과 진실의 충돌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자세히 들려주는 윤의 책 ‘Naming Nature’를 향해 걷지 말고 뛰어가보시라”고 적었다.


룰루 밀러가 추천한 그 책이 ‘자연에 이름 붙이기’란 제목을 달고 출간됐다. 한국계 생물학자이자 미국 뉴욕타임스의 과학 칼럼니스트인 캐럴 계숙 윤이 2009년에 발표한 책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자 정지인이 새 책 번역도 맡았다. 정지인은 “룰루 밀러가 우리에게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알려준다고 한다면, 캐럴 계숙 윤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럼에도 ‘물고기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이야기한다”고 설명했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는 생물과 분류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과학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사소해 보이는 주제를 끌고 굵직하고 중요한 담론을 펼친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이라는 점에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비슷하다. “분류학이 이렇게 재미있을 일인가 싶게” 재미나다고 한 번역가의 평에 동의하게 된다.

책은 1700년대 초 스웨덴의 칼 린나이우스(린네)와 함께 시작된 과학적 분류학이 200년 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조명한다. 동식물을 분류하고 명명하며 자연의 질서를 세우는 게 분류학이고, 그 일을 하는 과학자들이 분류학자다.

생명의 세계를 분류하고 명명하는 일은 인류가 태고적부터 해온 일이었다. 원시 인류에게 분류는 생존에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린나이우스는 계-문-강-목-과-속-종이라는 분류체계를 만들었고 분류학을 하나의 학문 분야로 정립했다. 이후 분류학은 다윈을 거치며 진화분류학, 수리분류학, 분자분류학, 분기학으로 전개됐다.

저자는 분류학의 발전 과정에서 과학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는 생물계에 대한 직관적 지식과 충돌하고 결국 이를 폐기시켰다는 데 주목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기학의 선언이 대표적이다. 수학과 통계학,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들, 철저한 진화적 논리를 따르는 현대 분류학에는 ‘어류’라는 분류가 없다. 물고기의 후손이 육지로 올라와 소나 도롱뇽 같은 육상 척추동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물고기를 분류하려면 소를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분류와 명명을 전문가들에게 맡겨 버렸다. 그런 건 과학자들이 제일 잘 아는데, 그들은 우리에게 어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새들이 공룡이라는 소리까지 한다.”

진화적 유연관계를 기준으로 생물을 분류하는 분기학자들은 ‘어류’라는 분류군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물고기라는 게 없다니? 이것은 과학에 따른 논리라 해도 대다수 사람들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다. 분류학의 200년 역사는 이렇게 과학과 직관의 충돌로 점철돼 있다. 윌북 제공


소가 어류라거나 물고기 같은 건 없다는 과학을 우리가 받아들이긴 어렵다. 아주 어린 아이들도, 과학을 모르는 원주민들도 물고기를 인지하고 다른 동식물과 구분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에게는 생명의 세계에 대한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시각인 ‘움벨트’(Umwelt)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각에 의존한 분류를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았던 분류학의 역사나 동식물 분류가 나이 불문, 지역 불문, 문명 불문 거의 동일하다는 인류학적 연구들은 움벨트가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진정한 과학적 분류는 생명 세계의 자연적 질서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 시각과 정반대 입장에 선다”는 딜레마를 제기한다.

분류학의 역사는 과학과 움벨트의 대결로 점철돼 왔다. 결국 과학이 승리했고, 움벨트는 폐기됐다. 저자는 인간이 움벨트를 잃어버린 사태에 대해 고찰하면서 과학 지상주의의 결손에 대해 얘기한다. 무엇보다 인간과 자연이 멀어진 결정적 이유가 거기 있다.

“대멸종이 진행 중인데도 우리가 전혀 염려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는 유일한 이유는, 한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소중히 여기고 연구하고 그 안에서 살았던 생명의 세계에 대한 시각을 스스로 폐기해버렸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학자인 자신 역시 생명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이 과학이라고 확신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쓰는 동안 다른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과학과 함께 움벨트도 소중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는 생물은 하나의 진실이라기보다 프리즘에 가깝다면서 과학도 움벨트도 생명을 읽는 하나의 관점, 하나의 변주로 이해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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