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의 귀환, 그가 감춰 온 언어의 칼날
[정지혜 시인, 황광우 작가]
▲ 장석 시인의 < 그을린 고백 > |
ⓒ 출판사 강 |
시란 무엇일까? 1980년에 등단을 하고서 40여 년간 차마 시를 쓰지 않았던, 그러나 결국 돌아와야만 했던 시의 끈질긴 인력을 생각한다.
"이를 허망이라 하지 않고
우리는 희망이라고 말한다 틀림없는 희망"
- '그날이 왔다, 새가 노래하려면 - 노회찬에게' 부분
한 날 한때, 같은 꿈을 가진 채 동시대를 살아왔던 벗에게 전하는 애틋하고도 맷돌처럼 단단한 마음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우리의 세상은 영원히 머무르는 곳이 아니라 '고이면 썩어갈 한 시절'이지만, 결코 나그네의 순례가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인다.
장석의 시에는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빛과 그림자가 함께 존재한다. '사라져 버린 일'을 너무 많이 겪으며, 남은 잿더미까지 지켜보아야 했던 처연하기까지 한 삶을 살아가는 일이 '끓는 헛소리를 울컥울컥 쏟고 있는 그을린 주전자'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비명도 없이 날아 올라간 검은 새'(그을린 고백)의 행간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회의주의나 염세주의로 흐르지 않는다.
'세상은 좀 기운 대로/십일월로 잘 흘러가고 있으니(시월 편지)'
세상은 내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스파링하며 입술이 터지도록 맞아도 승부가 날 때까지 링에서 내려올 수 없다. 버텨야 한다. 때로는 버티는 일이 포기 하는 일보다 더 힘겹게 느껴지는 게 세상이다.
세상의 많은 집
내 집으로 가는 길은 분명한데
내게 가는 길은 보이지 않네
- '맹지의 집' 부분
▲ 장석 시인 출판 기념회 |
ⓒ 황광우 |
나에게로 가는 길, 그 길은 굽이지고 험난하며 캄캄하다. 통합된 자아를 가진다는 것은 미적분을 풀어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맹지의 집'을 읽으니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떠오른다. 평생 팔다리가 모두 묶인 채 동굴의 벽만 바라보는 사람들, 타오르는 모닥불로 인해 벽에 비친 그림자를 유일한 실채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니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듯, 장석 시인은 시를 통해 절망에서 희망을, 캄캄한 밤에서 첫날의 새벽을, 소멸에서 생성을, 작별에서 '새로 지은 밥 같은 사랑을',(빛의 그물질), 끝에서 처음을 물이 마를 때까지 대차게 퍼 올린다. 시인이 켜켜이 쌓아온 세월의 단층을 반으로 자른 종단면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몇은 떠나가고'(시절 인연), '검은 것에는 슬픔만이 아니라 기쁨도 있음'(봄 편지)을 상기하며, '또 필 꽃이나 다시 올봄을 생각하지 않는'(시절 인연) 삶 속에서 쉬이 가늠할 수 없는 무게와 깊이가 느껴진다.
그러나 그 끝을 따라가서 닿는 것은 결코 덧없음이 아니다. 오히려 앞뒤 재지 않는 순전한 희망과 낟알 같은 희망의 작은 단서들이다. 타고 남은 장작더미에서 발견한 작고 환한 잉걸들이다.
정곡을 찌르다
1992년에 개봉한 <여인의 향기>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는 폭발 사고로 시력을 잃은 퇴역군인 프랭크가 등장한다. 한 여성에게 탱고를 가르치던 프랭크는 스텝이 엉키자 '탱고죠'라고 말한다. 프랭크가 삶을 포기하려고 할 때 찰리는 이 말을 되돌려준다.
술의 일은
모든 것을 헛되게 하고 또 헛되지 않게 함을
늙은 술꾼은 몽롱하게 깨닫지
- 술의 노래 부분
취하지 않고 사는 삶, 중독되지 않은 삶이 가능하기는 할까? 사랑에 취하거나 정의에 취하고, 사상에 취하거나 구질구질한 생의 한가락에 취해서 헛된 일들을 헛되지 않게, 헛되지 않은 일들을 헛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술의 일이라는 그의 표현은 정곡을 찌르고야 만다.
'세월이 내 잔에 남긴 폐수를 들여다보고', '광속으로 시간이 빠져나가 버린 전선 껍질을 깨물어 보는' 시간에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동안 가질 수밖에 없는 원죄 의식과 언제든 허물어져 버릴 뱀 껍질 같은 존재의 가벼움이 한데 뒤섞여 있다.
어느 날 아침, 커피를 사서 들고 가다 바닥에 쏟은 적이 있다. 그 커피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 안에서만 커피의 기능을 할 수 있었다. 바닥에 엎질러진 커피는 내가 마실 수 없으므로 순식간에 커피가 아닌 게 되었다.
존재란 그렇다. 단지 형태가 바뀌었을 뿐인데 유의미에서 무의미로 전환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어미 배 속에서 무에서 유로 자라는 태아가 그러하듯, 우리는 유의미로 향한 모든 것을 찬양한다. 유와 무가 한통속인 데도 말이다.
'누군가 떠났다/ 세상은 온기를 잃는구나/ 그러면서 이루어진 일이/ 기껏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음이라니'(시절인연-추분), '지상에서 밤하늘에 이르는/ 이승으로부터 피안에 닿는/ 우리 생의 피륙을 짜보리니'(시절인연-한가위)와 같은 구절에서 이러한 유의미의 무의미성, 무의미의 유의미성을 찾아볼 수 있다.
섬광처럼 빛나는 재치
장석 시인에게 꿈은 어떤 의미일까? 속세에서 꿈은 뚜벅뚜벅 걷거나 뛰어서 가까이 가거나 붙잡아야 할 것, 한 걸음씩 다가가 낚아채야 할 것, 그도 아니면 신기루를 손가락으로 움켜쥐는 몽상가의 허무맹랑함이다.
'꿈을 열고 들어가 누워라', '꿈은 켜져 밤하늘처럼 휘황하고'(숲에서-귀가와 출가),
'꿈이 어떻게 우리에게 걸어오는지'(가을의 연등)와 같은 표현을 살펴보자.
장석 시에서 꿈은 공간성과 능동성을 가지기도 하고, 빛의 이미지로 깜빡거리기도 하며 경계의 속성을 띠기도 한다. 인간이 지향성과 능동성을 가지고 다가가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자연과 같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거나 오히려 우리에게 뚜벅뚜벅 걸어오는 존재다. 꿈에 대한 표현이 꿈처럼 몽롱하다.
세상살이에 찌든 후부터는 피식 웃는 순간이 참 귀하고 좋다. 순간 온몸의 긴장이 풀어지면서 잠깐이나마 어린아이가 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장석의 시에는 중간중간 웃음 짓게 하는 유머가 곳곳에 도포되어 있다.
'매가리도 우리를 보면/ 죄다 한통속으로 생긴 사람들은 어찌 제 반려를 정하는지 궁금하리라'(짝), '산중 선가 처마 아래에서 주석하던 목어가 헤엄쳐 왔나/ 꼬리지느러미를 휘둘러 나를 쳤네/ 죽비를 맞은 땡중처럼 깨어나네'(꼬리지느러미에 뺨을 맞다)와 같은 표현에서 나는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깊은 혜안이 담긴 시들 사이에 태연하게 껴있는 재치 있는 표현들이 섬광처럼 빛난다.
장석의 시는 그야말로 무지갯빛과 같다. 다채로운 빛의 향연 속에 어우러져 '늘씬한 봄바람의 춤'(숲에서-수화)을 추는 것 같다. '빛의 까막눈이 된 작은 떠돌이별', '저무는 시간', '자신의 죽음을 껴안고 누워 있는 숲'을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하고 그윽한 시선이 느껴진다.
알 수도 모를 수도 없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풀 수도 풀지 않을 수도 없는
수수께끼 같은 적멸
나를 칭칭 감은 채 명멸하는 꼬마전구
- 수수께끼 부분
40년만에 출간, 그가 품고 있던 감정
▲ 장석 시인의 시는 치열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
ⓒ 픽사베이 |
장석 시인은 어떻게 긴 시간 동안 인생의 한 뭉텅이를 감각의 언어를 숨기고 살 수 있었을까? 오랜 시간을 건너와 태어난 장석의 시어들은 죽어있는 순간이 많았던 나에게, 젊음의 한가운데에 있는 나의 잠을 흔들어 깨우듯 감각의 파동을 일으킨다. 문학도의 꿈을 가진, 설익은 사춘기 소년이 쓴 글이 아닐까 싶은 맑고 청아한 시어와 표현에 터질 듯 가슴이 벅차오른다.
시란 무엇인가? 다시금 질문을 던져본다. '작은 별에서 자주 나동그라지는 우리들'(우주인)이 나동그라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삶의 행진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연금술사가 아닐까?
시를 쓰면 나의 맨얼굴을 마주하듯 부끄럽다. 곧이어 환희에 차오르며 열반의 경지에 다다른다. 시인들이 시를 쓰는 이유이자 시를 쓰지 못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를 쓰고자 할 때는 동굴 밖에 나와 태양이 비추는 사물의 실재를 똑똑히 봐야 한다. 세계를 똑똑히 바라본다는 것은 두렵고 불안한 일이다. 한쪽 눈을 감고도 살 수 있지만, 언어의 칼날로 사물을, 세계를, 자아를 날카롭게 도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석 시인이 40년 만에 시집을 연이어 출간하는 일은 오랜 기간 갈아온 칼을 마침내 꺼내 들고 묵혀두었던 살점들을 처연하게 도려내는 일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들뜬 열기로 지나온 젊은 시절이 있다. 그 들뜬 열기는 열렬한 사랑으로 이어지거나 사회나 국가를 위한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기였을 때
나도 내게 유성처럼 날아온 눈빛 손짓 몸짓과 부딪
혔으리라
별에게서 유래해 어느 시인에게 전해진 기운을 나
도 조금 나누어 받아
지금 이런 시라도 쓰는지 모르네
(중략)
별 가루 시 가루가 네게도 전해져
너의 시간에도 여전히 시의 아기들이 태어나길 바
라네
- '접촉' 부분
승강장에서 마주친 '엄마 가슴에 매달린 아기'와 '손가락 악수'를 하고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팔백 개월의 시인은 생각한다. 언젠가 아기였을 때 별에서 유래해 어느 시인에게 전해진 기운을 조금 나누어 받았는지도 모르겠다고. '별가루', '시 가루'가 팔 개월 아기의 시간에도 전해지면 좋겠다고.
장석 시인의 시에서는 치열함이 있으나 그 끝에 만져지는 감각은 따뜻함이다.
뜨거운가 싶다가도 스르륵 잠에 빠져드는 순간과 같은 포근한 온기가 슬며시 전해진다. '유성처럼 날아온' 시인의 시간에서 태어난 시의 아기들을 가만히 들여
다 보고 싶다.
* 이번 시평의 작자는 정지혜(시인) 입니다. 정지혜 시인은 황광우 작가의 제자입니다. 황광우는 제자의 시평을 가다듬어 오마이뉴스에 투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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