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아무리 마셔도 숙취 없어" 맥주 사랑에 빠진 감독
[이선필 기자]
스페인에서 술하면 자연스럽게 와인이 떠오른다. 유럽 지역 대표적인 와인 생산지에서 이 감독은 맥주를 찬양하다가 급기야 직접 양조장을 차렸고, 해마다 맥주 축제를 연다. 다큐멘터리 영화 <람빅, 시간과 열정의 맥주> 다니엘 루이즈 감독이다. 국내 개봉에 맞춰 한국을 찾은 그를 개봉일인 11일 오후 서울 합정동 인근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영화는 람빅이라는 벨기에 전통 맥주를 탐구하는 여정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수제 맥주로 600년 넘게 제조방식이 이어지고 있다. 배럴에서 숙성시키고 식탁에 오르기까지 최소 3년이 걸리는 람빅은 그 명맥이 끊길 뻔하다가 최근 들어 주목받기 시작했다. 감독은 벨기에 내 여러 지역 양조장을 돌며 다양한 람빅과 그 역사를 관객에게 전하고자 한다.
▲ <람빅, 시간과 열정의 맥주>를 연출한 다니엘 루이즈 감독. |
ⓒ 마노엔터테인먼트 |
한국에 도착한 후로 이미 한국 양조장은 물론이고, 막걸리 공장도 방문했다고 한다. 인터뷰 직전에도 그는 맥주 한 캔을 비운 터였다. 대체 무엇이 그를 맥주에 빠지게끔 했을까.
"와인도 물론 좋아하지만 지금은 맥주에 빠져 있긴 하다. 20년 전엔 와인만 마셨다. 공장에서 생산한 뻔한 맥주만 있는 줄 알았거든. 그러다 처음으로 수제 맥주를 마시게 됐다. 아일 페일이었는데 사랑에 빠지게 됐다. 다양한 맛이 녹아 있었고, 사용하는 재료들도 특별했다. 그렇게 수제 맥주를 즐겨 마시게 됐고. '맥덕'이 되었다(웃음).
그렇게 마시다가 람빅을 알게 됐는데 와인보다 이 맥주가 훨씬 더 높은 수준이라는 걸 느꼈다. 와인 애호가들에겐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이 영화를 찍기 직전까지 3년간 스페인과 벨기에를 오가며 람빅 제조자들을 만났고, 그들의 강한 열정을 느꼈다. 제가 이번에 한국에 처음 왔는데 다음에 또 와야겠다고 결심했다. 바로 소주와 막걸리에 빠졌기 때문이다. 막걸리 제조방식이 람빅과 유사하더라. 내년 축제 때 막거리를 꼭 초대하고 싶다. 언젠가 <시간과 열정의 막걸리>를 찍을 수도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다니엘 루이즈 감독은 람빅을 아무리 마셔도 숙취가 없음을 강조했다. 무가당에 장에도 좋고, 30년 넘게도 보관할 수 있다는 등 람빅 예찬론을 펼치던 감독은 다양한 수제 맥주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임을 짚었다.
"람빅은 자연 발효 스타일인데, 한국에서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 방식으로 안다. 어쩌면 그게 경쟁력 아닐까.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굳이 자기네 나라로부터 수입한 맥주를 건네는 게 아닌 한국에서 직접 만든 맥주나, 막걸리를 건네는 게 훨씬 더 좋을 것이다. 날씨도 좋은 만큼 벨기에 람빅과는 또다른 스타일의 맥주가 나올 것이다."
영화는 평이한 구성이다. 람빅 자체의 여러 갈래를 파보겠다는 의지의 반영으로 보인다. 벨기에 내 여러 양조장, 맥주 장인들을 만나며 그들에게 람빅 관련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인터뷰한 식이다. 흥미로운 건 람빅 제조자들 사이에서도 이를 전통 방식을 고수해 만들어야 한다는 쪽이 있고, 생맥주로 개량해 대중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는 쪽도 있다는 점이었다.
다니엘 루이즈 감독은 "캔에 담겨 있든 병에 담겨 있든 람빅은 좋은 향과 맛을 간직하는 보존이 중요한데 그게 바로 그들의 노하우"라고 말했다.
▲ <람빅, 시간과 열정의 맥주>를 연출한 다니엘 루이즈 감독. |
ⓒ 마노엔터테인먼트 |
그렇다면 맥주 강국인 독일, 미국 맥주에 비할 때 람빅 같은 수제 맥주가 과연 경쟁력이 있을까. 국내에서도 각 지역 혹은 동네를 대표하는 여러 수제 맥주가 시중에 나와 있다. 내수 시장을 넘어 국제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묻는 말에 감독은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그 말은 마치 좋은 레스토랑이 버거킹과 맥도날드 매장과 경쟁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과 같다. 모든 양조사들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똑같이 팔 수는 없다. 독일 라거 맥주는 대부분이 마시기 편하게 표준화 된 결과물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듯 맥주에도 캐릭터가 있다. 싸고 맛있는 맥주가 있다면 많이 마시길 바란다. 그런데 다음날 머리가 엄청 아플 것이다. 숙취를 피하고 싶다면 람빅을 마셔라."
질문을 바꿔보았다. 와인, 위스키로 크게 양분된 주류 시장에서 수제 맥주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이 지점에서 다니엘 루이즈 감독은 '지속 가능성'을 언급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수제 맥주 시장이 빠르고 크게 성장했다. 국제적으로도 그들이 장사를 잘한다. 수년에 걸쳐 훌륭한 홉을 생산했고, 연구도 하고 있다. 그 홉을 중심으로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고, 안정기에 접어든 것 같다. 근데 좀 뻔하지 않나. 미국 IPA는 수제 맥주 바에 가면 항상 맛볼 수는 있지만, 개성이나 독특함이 없다.
와인마다 떼루아(Terroir)라는 게 있다. 풍토, 지역성이라는 건데 우리가 유럽 어느 곳을 가든 그 지역의 독특한 와인을 마실 수 있잖나. 수제 맥주엔 아직 떼루아라는 게 없다.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재료를 이용해 맥주를 만드는 경우가 적기 때문이다. 물론 벨기에나 체코, 독일에 가면 떼루아를 느낄 수 있다. 맥주의 본고장인 만큼 고유성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국제화, 세계화를 시킬 게 아니라 지역성과 고유성을 잘 지키며 연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사람들에게 파는 게 아니라 그들이 직접 와서 마실 수 있게끔 하는 고유성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 수제 맥주의 발전 가능성을 본다. 물론 제 의견이 맥주 산업에선 중요하진 않을 것이다(웃음). 다만 제 경우엔 여행을 가도 버거킹, 스타벅스 이런 데는 절대 안 간다고 말씀드리는 것이다. 한국 찻집이나 막걸리집은 당연히 간다. 그 지역만의 작고 아름답고 다양한 것들이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을 말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영등포에 있는 수제 맥주집에 갔다. 국제 대회에서 1등 한 맥주가 한국에 있더라(웃음). 분명 또 좋은 맥주나 막걸리가 있을 것이다. 제 다음 영화가 바로 떼루아 관련 이야기다. 제 양조장도 기본 재료를 수입하다가 직접 생산하는 걸로 방향을 바꿨다. 제가 사는 카탈루냐 지역의 변화를 영화에 담을 예정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거기에 맥주가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얘기하려 한다. 미래를 위해 우리 환경을 위해 지구를 돌봐야 한다. 컨테이너에 재료를 가득 싣고 세계 곳곳을 옮겨 다니게 하는 건 이제 지양해야 한다. 지속가능성을 위해 우린 지역성에 집중해야 한다."
단순히 술 애호가 내지는 전문가인 줄 알았던 다니엘 루이즈 감독은 깊은 철학적 사고를 품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지역에서 나름 진정성 있게 수제 맥주를 출시하고, 환경과 어우러진 축제를 고민하며 만든 첫 번째 영화가 한국 관객에게 어떤 화두를 던질까. 기대해 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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