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고의적 학살,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진짜 이유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임상훈 기자]
▲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무력 충돌 이틀째인 8일(현지시간) 가자지구에서 미사일이 폭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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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소요 기간 대비 팔레스타인 지역 현대사 최대의 군사분쟁이 되고 있다. 무엇이 이런 상황을 초래했을까? 분명한 것은 극단주의자들은 늘 폭력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했고, 폭력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더 큰 폭력을 잉태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은 배신자 낙인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되는 통한의 역사가 이 지역에서 반복돼 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을 전격 침략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는 극단주의 무장세력이다. 이스라엘에 탄압받는 팔레스타인의 봉기(1차 안티파다)에 즈음해 1987년 처음 설립됐다.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팔레스타인 쪽 역할의 단골 주역을 맡아왔다.
팔레스타인은 원래 현재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위치한 지역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오스만제국 지배하의 이 지역은 1차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한 후 승전국의 전리품으로 전락했다. 아라비아반도 북부에서 튀르키예 동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 2차대전 후 한반도가 그랬듯,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잘려 분할 점령됐다(사이크스-피코 조약).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북부는 국제사회의 공동 통제영역으로, 남부는 영국 영향 하의 광활한 영역으로 복속됐다. 이전까지 이 지역에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믿는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여기에는 히브리족과 팔레스타인족도 포함된다. 이들 두 민족은 종교와 언어는 다르지만 종족 차원에서는 아랍인들에 비해 비교적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지역의 진짜 비극은 러시아, 유럽, 미국 등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시오니즘 신화와 함께 시작된다. 민족국가 의식이 태동하던 19세기, 유럽의 반유대주의 정서에 분노하는 유대인들은 시온(예루살렘의 한 언덕)의 땅에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거대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벨푸어 선언에 자극을 받은 이들은 본격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를 시작한다.
벨푸어 선언은 오스만제국에 맞서는 영국이 유럽의 유대인 자본을 전쟁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독립국가를 약속한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영국은 같은 지역에 아랍민족의 독립국가를 약속하는 후세인-맥마흔 협정도 체결한다. 앞서 언급한 사이크스-피코 조약까지 하면 영국은 서로 모순되는 세 개의 사기 계약을 체결한 셈이다.
이 거대한 사기극의 주인공 영국은 결국 문제 해결을 못 한 채, 2차대전 후 국제사회로 공을 넘겼고 이 문제를 떠안은 유엔은 팔레스타인지역에 '두 국가' 건설을 보장하는 결의를 하게 된다. 결국 팔레스타인인들은 기존의 땅을 빼앗기는 결과에 분노했고, 유대인들은 온전한 영토를 보장받지 못한 결과에 분노했다. 1947년 유엔의 결정 이후 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 10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한 주민이 이스라엘 공습으로 파괴된 건축물 잔해 가운데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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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스라엘을 이루는 '주류' 유대인들은 결국 혈통적 정체성보다 시온주의라는 이념적 정체성을 국가 구성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무의식에는 필연적으로 토착 이민족들과의 화합과 융합보다 배타적 고립주의에 근거한 민족주의 국가관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시온주의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극단적 고립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건국을 주도했던 이들은 오히려 팔레스타인 지역의 토착인들을 자신들과 같은 유대인의 후손으로 생각해 융화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종교적으로는 그들에게 유대교 사상을 전파하려 했고 이러한 시도는 아랍권 세력의 반발에 부딪히곤 했다.
그들이 꿈꾸는 가나안의 복지는 '키부츠'라고 불리는 유대인 특유의 공산주의적 농업 공동체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좁은 의미로 '노동 시온주의'라 불리는 이 이념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들' 모두가 몸담았던 사상적 기반이었다. 실제 이 이념에 근거한 정치인들이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부터 17대 이츠하크 라빈까지 30여 년간 연속 집권을 하기도 했다.
시온주의 국가를 건설하면서도 팔레스타인 및 아랍국가들과 평화적 관계를 꿈꿨던 이들의 소망은 25대 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암살로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된다. 라빈 총리는 아랍 국가들과의 갈등 속에서도 시나이반도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지지한 인물이다. 시몬 페레스 총리와 함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끝없이 그들과 머리를 맞댔다.
그 결과는 흔히 '오슬로 협정'이라 불리는 1993년부터 1995년까지 2년에 걸친 평화공존 프로젝트로 연결된다. 1947년 유엔이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강요된 '두 국가 해법'이 이제는 당사국 스스로 방법을 찾기 위한 협상을 이뤄낸 것이다. 그 공로가 인정돼 1994년 라빈 총리는 이스라엘 페레스 외무장관과 아라파트 PLO 의장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간혹 오슬로 협정을 팔레스타인 분쟁 악화의 주요 원인으로 여기는 목소리도 있다. 그 이후 이 지역 평화는 내리막길을 걸었다는 이유다. 물론 협정 내용만 보면 목표치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과 설명이 부족하다. 하지만 오슬로 협정은 대화의 시작이었고 앞으로 이뤄야 할 결과지향적 합의의 큰 틀이었다. 이것 때문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쟁이 심화됐다는 주장은 극단주의 세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듬해인 1995년 11월 4일, 라빈 총리는 유대인 극우파 청년의 총격에 암살당하고 만다. 노동 시온주의의 노력 또한 여기서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이후 양측 간의 평화 협상은 지지부진을 거듭하다 사실상 소멸하게 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서로를 향한 증오의 불길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라빈 총리를 제거한 이스라엘 극우세력은 점차 팔레스타인을 향한 공격적 대응 수위를 높였고 이스라엘을 점차 우경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21세기 들어 이스라엘의 노동 시온주의는 점차 세력을 잃고, 그를 기반으로 하는 이스라엘 건국의 주동세력 노동당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28대 에후드 바라크 총리를 마지막으로 집권은커녕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 10일(현지시간) 가자지구 남부 칸 유니스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무력 충돌에 피란을 떠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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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단체 PLO가 외교무대로 올라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 대화 상대로 삼았던 것은 이스라엘의 노동 시온주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슬로 협정 등을 거치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거듭난 PLO는 파타(Fatah)라는 정당을 만들고 선거를 통한 정상적 정부를 지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내·외부적 요인에 의해 곧 나락의 길을 걷게 된다. 내부적 요인이 파타 정부의 부패와 무능이라면 외부적 요인은 이스라엘 사회의 근본적 변화다.
이스라엘의 극우화와 함께 팔레스타인의 대이스라엘 국민 정서 역시 점차 극우화의 길을 향하고 있다. 줄곧 집권당 자리를 유지해 온 파타는 이스라엘의 우파 리쿠드당이 주요 정당으로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2006년 선거에서 하마스 무장세력에게 제1당 자리를 내주고 만다.
현재 팔레스타인의회(PLC) 132석 가운데 하마스가 74석을 보유하며 제1당 자리를 유지하고 파타는 45석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특히 서안지구와 가자지구가 사실상 서로 고립된 상황에서 파타는 서안지구의 다수당파를 이루고 있지만 하마스는 가자지구를 완전히 독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압박이 커질수록 이들의 강경 목소리는 점점 거세진다.
이 배경 속에서 중동지역의 국제관계 또한 최근 급변하고 있다. 아브라함 협정(2020년)으로 아랍에미리트, 바레인이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는 역사적 합의를 한 이후 수단, 모로코 역시 이스라엘과 관계가 가까워지고 있다. 최근에는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과 수교를 향해 한발한발 다가서고 있다.
이 모든 움직임이 자신을 고립시키기 위한 미국의 전략이라 판단한 이란은 일거에 판을 뒤흔들 한 방을 노리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특히 가자지구의 하마스는 자신들의 국가수립 목표에 버팀이 되어주던 아랍 국가들이 하나둘 이스라엘의 수교국이 되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의 외교적 차원의 희망은 이란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역시 한 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내부 사정도 팔레스타인에 점점 불리해져만 갔다. 현 이스라엘 정권에는 샤스당을 포함, 극단적 극우세력들이 리쿠드당과 함께 연정을 꾸리고 있다. 사법 리스크에 떨고 있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자신의 사법처리로 연결될 수 있는 연정 붕괴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 그럴수록 소수파 극우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그렇게 이스라엘 정치는 광기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지난 7일 하마스의 자살에 가까운 전면적 이스라엘 공격의 배경이다. 이들은 특히 이스라엘 민간인을 향한 고의적 학살과 인질포획을 일삼았다. 더 이상의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는 극단적 대결로 가겠다는 메시지다. 온건파의 입지를 없애면서 이 기회에 서안지구까지 포함한 팔레스타인 전역을 수중에 넣겠다는 의도도 내포돼 있다.
2023년 가을, 세계는 중동의 데탕트를 말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수니파 국가들, 즉 미국과 원활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 보이는 착시였다. 소집단과 국가 차원에서도 그렇듯, 국제관계에서도 늘 소외되고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는 있다. 이곳의 관리가 국제정치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
침략과 민간인 학살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고 국제법 위반이다. 당연히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 하지만 평화를 관리해야 하는 국제정치의 시각에서는 죄를 벌하는 차원에만 머물 수 없다. 그러기에는 벌어진 결과가 너무나 잔혹하기 때문이다. 죄와 악을 벌하기 전에 그것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국제관계의 최선이다. 그것이 또한 사법과 정치의 차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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