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없습네다" 北선수도 웃참 실패…유쾌한 수현씨, 장미란 꿈꾼다
"금메달리스트보다 더 큰 관심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웃음)"
11일 부산 사직동 부산체육회 역도훈련장에서 만난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역도 동메달리스트 김수현(28·부산체육회)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김수현은 지난 5일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 역도 여자 76㎏급에서 합계 243㎏(인상 105㎏·용상 138㎏)을 들어 올려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4 인천(4위), 2018 자카르타-팔렘방(4위)에 이어 항저우까지, 세 차례 도전 끝에 일군 감격의 생애 첫 아시안게임 메달이었다. 금메달은 북한 송국향(22·합계 267㎏), 은메달도 북한 정춘희(25·합계 266㎏)가 땄다.
메달을 딴 지 일주일이 됐지만, 김수현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벨을 들었다. 16일 열릴 전국체육대회(목포) 때문이다. 김수현은 "전국체전은 지난 9월 세계선수권(인상 은메달), 아시안게임에 이어진 주요 대회의 마지막"이라면서 "전국체전 3관왕(인상·용상·합계)을 차지해 멋진 피날레를 장식하겠다. 지금처럼 좋은 흐름과 몸상태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그게 아까워서라도 대충 못 한다"며 웃었다.
김수현은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정상급 실력뿐만 아니라 좀처럼 보기 힘든 북한 선수들의 미소를 끌어낸 '유쾌한 성격'으로도 큰 관심을 모았다. 메달리스트 기자회견에서 북한 송국향(금)과 정춘희(은)는 무표정으로 "중국 선수(랴오구이팡)의 부상이 심하지 않은지 걱정된다. 오늘 생일인데 축하 인사를 전한다"며 부상으로 경기 중 기권한 중국의 랴오구이팡을 걱정했다. 그런데 김수현은 "나는 3번째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드디어 메달을 땄다. 기분이 좋아서 중국 선수가 다친 것도 몰랐는데…"라며 뒤늦게 "중국 선수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김수현의 '엉뚱한 대답'에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던 송국향, 정춘희도 순간적으로 '무장해제'됐다.
두 북한 선수는 그만 참던 우승을 터뜨렸다. 웃는 모습을 취재진에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만 들썩였다. 이 순간만큼은 '여전사'가 아닌 영락없는 '여대생'의 순수한 얼굴이었다. 아시안게임 기간 내내 이어졌던 남북 선수단간의 냉랭한 분위기도 없었다. 김수현은 이어 "내가 림정심 언니를 좋아한다. 정심 언니보다 더 잘하는 선수 2명과 경쟁하게 돼 영광"이라며 "목표를 더 크게 잡고, 이 친구들만큼 잘해서 한 단계 더 올라가고 싶다"고 덕담하자, 북한 선수들은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림정심은 북한의 역도 영웅이다. 2012 런던올림픽(여자 69㎏급), 2016 리우올림픽(여자 75㎏급),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여자 75㎏급)을 석권했다.
'아시안게임 기자회견 당시 일부러 재밌는 대답을 준비한 것이냐'고 묻자 김수현은 "꿈에 그리던 메달을 딴 터라 멘트를 준비하는 건 생각도 못 했다. 경기에 집중하느라 챙기지 못한 중국 선수가 부상으로 포기한 줄 몰랐다. 걱정한다고 한 얘기인데, 그게 빵 터질 줄은 몰랐다"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기자회견에선 밝히지 않았는데 "시상대에서 따로 떨어져 사진을 찍고 있는데, 송국향, 정춘희 선수가 '같이 찍자'고 했다. 내가 '그래도 돼'라고 말하니, 북한 선수들이 '일 없네다(괜찮다)'라며 먼저 손을 내밀어 기분 좋았다"고 덧붙였다.
김수현은 북한 선수, 코치들과의 뒷이야기도 전했다. 그는 "(입상 가능성이 커지자) 북한 김춘희 코치님이 '기회가 왔다. 덕분에 더 집중해서 했다. 내가 (북한 역도 영웅) 림정심 언니를 좋아하는데, 북한 코치님이 나를 '금심'이라고 부르신다"고 소개했다. 역도 종목에선 남북이 격의 없이 지내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수현은 "이번 아시안게임에 나온 북한 선수들은 한국 선수들을 좀 경계라더라. 하지만 그들의 선배 격인 북한 선수들과는 내가 데뷔한 2014년부터 언니-동생으로 부른다. 이번 대회에 나오지 않은 림정심이나 김국향 선수와 국제 대회에서 마주치면 내가 먼저 '언니 오랜만이에요'라고 먼저 인사면 언니들도 '그래 수현아 잘해, 몸 상태 좋아보인다'라고 격려해주신다. 이번에 북한 선수들에게 물어보니 정심 언니는 출산했다고 하더라"라고 전했다. 김춘희 코치 등에게 '감사하다'라거나 '축하해요. (선수들이 입상해서) 기분 좋으시겠어요'라고 인사하는 사이다. 한 북한 남자 선수는 '수현아 나한테 시집와'라고도 농담한 적 있다. 그 오빠는 지금 북한에서 잘지낸다고 들었다"라고 말했다.
이날 훈련장엔 가수 터보가 1995년에 발매한 '나 어릴 적 꿈'이 울려 퍼졌다. 이어 DJ DOC의 'DOC와 춤을(97년)'이 흘렀다. '같은 팀 언니, 오빠들이 노래를 선곡한 거냐'고 묻자 김수현은 "내가 했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 부른 게 취미이자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면서 "1990년대 노래는 가사가 직설적이라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명곡이 많아 즐겨 듣는다. 아시안게임 동메달을 따기 직전엔 황규영 아저씨가 부른 '나는 문제 없어(93년)'를 들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온 노래다"라며 킥킥거렸다.
김수현은 수준급 노래 실력까지 갖췄다. 선수촌 '가왕' 출신이다. 지난해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 가왕선발전에서 에일리의 '보여줄게'를 열창해 여자부 1위를 차지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복면가왕' '너의 목소리가 보여' 등 예능 프로에 러브콜을 받고 노래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그는 "음악 예능은 접수했으나 유재석 아저씨와 운동선수 롤모델인 서장훈 아저씨가 진행하는 '토크쇼'에 나가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김수현은 '국가대표 커플'로도 유명하다. 남자 친구는 가라테 국가대표 피재윤(22)이다. 피재윤도 아시안게임에 출전했으나 메달 획득엔 실패했다. 김수현은 "재윤이와는 가라테 국가대표 박희준 오빠 소개로 만나 작년 8월부터 사귀게 됐다. 재윤이는 구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장거리 연애'를 하는데, 매일 통화해서 괜찮다"면서 "내가 6살 많지만, 남자친구가 워낙 듬직해 의지된다. 데이트할 땐 사진 찍고 찜질방 가고 고기도 많이 먹는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비록 항저우에선 동반 입상을 못 했지만, 3년 뒤 나고야 아시안게임
에서 꼭 동반 메달을 땄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수현은 '장미란 키즈'다. 김수현은 중2 때이던 2008년 장미란(39·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베이징올림픽 역도 여자 최중량급에서 인상 140㎏, 용상 186㎏을 들어 당시 세계 신기록인 합계 326㎏으로 우승하는 장면을 보고 역도에 입문했다. 늦게 입문했지만, 고속성장해 고2 때 태극마크를 달고 '우상 장미란'도 만났다. 김수현은 틈이 날 때마다 동료들 자랑까지 했다. 그는 "우리 팀에서 아시안게임 국가대표가 3명이나 나왔다. 그중에서 저랑 손영희(87㎏ 이상급 은메달) 언니는 메달을 땄다. 비록 비가 오면 천정에서 물이 새고, 낡은 기구들로 힘든 환경에서 운동하지만, 감독님과 팀원 전원이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수현은 "장미란 선배님처럼 내년 파리올림픽에서 시상대 오르는 꿈을 꾼다. 그때까지 '세상 속 힘든 일 모두 지워버려, 슬픔은 잊는 거야 Never cry(엄정화 페스티벌 가사)' 하겠다"며 두 손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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