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만난 사람]“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 두둔? 성명서 위조된 것”
도서 구입·팩트체크 질문 줄이어
러시아 활동시절 연구 아직 부족
레닌 선물 논란 등은 개정판서 보충할 것
동상 이전 관련 정부 조언 요청 없어
역사학자 입장에서 "대체 왜"란 느낌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으로 기억되는 홍범도 장군이 일본에 대항해 처음 총을 잡은 건 1895년 의병대를 조직하면서부터다. 화승총을 들고 일본군에 대항했고 이후 28년가량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에게 가족은 항일투쟁의 동지였다. 부인 단양 이씨(실명 알려지지 않음)는 1908년 남편을 회유하는 편지를 쓰라는 일제의 강압에 저항하다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두 아들 역시 항일투쟁 현장에서 산화했다. 1920년 6월과 10월 만주에서 벌어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는 부대장으로 참전해 대승을 이끌었다. 이후 일본의 보복으로 간도 지역 조선인들이 학살당하자 1921년 원동공화국 아무르주 자유시(현 러시아 아무르주 스보보드니)로 이동해 다른 독립군 부대와 연합을 도모했으나 갈등을 빚은 끝에 ‘자유시 참변’에 휘말렸다. 자유시 참변 이후에는 연해주 일대에서 집단농장을 운영하다가,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해 병원과 고려극장의 경비로 일하다가 1943년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했다.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은 홍범도 장군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공을 인정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2021년에는 국내로 유해를 송환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됐고, 육군사관학교에는 흉상이 세워졌다. 하지만 최근 홍범도 장군의 과거 소련 공산당 입당 이력을 두고 국방부가 육사 내 흉상 이전 계획을 밝히면서 논란을 빚고 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기도 전 항일투쟁 과정에서 입당한 공산당 이력이 육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인데, 과연 그때의 공산당이 현재 북한의 공산당과 같은 개념일까. 흉상 이전과 관련해 국방부 대변인은 학계의 의견을 고려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했지만, 실제로 학계 전문가들은 역사를 어떻게 해석할까. 책 ‘홍범도 장군’(한울아카데미) 저자이자 홍범도 장군 연구 국내 권위자로 꼽히는 반병률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67·사진)에게 질문을 건넸다.
-홍범도 장군 이슈가 뜨거웠다. 홍범도 장군 관련 서적도 큰 관심을 받았는데, 변화를 체감하는지.
▲출판사에서 책 판매가 늘었다고 하더라. 학술서에 가까워 판매량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사적 사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이 찾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말보다 사료를 보고 직접 판단하려는 모습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대중강연을 나가도 홍범도 관련 내용에 관심도가 높다. 국방부 해명 등과 관련해 팩트체크를 요구하는 질문도 많은 편이다.
-이번 논란을 통해 홍범도 장군의 생애가 다시 주목받았지만, 서로 다른 평가가 충돌했다. 학계에서 홍범도 장군과 관련한 연구는 얼마나 이뤄졌나.
▲봉오동이나 청산리 전투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연구가 이뤄졌지만, 홍범도 장군의 주요 활동 무대인 러시아와 관련한 연구는 부족한 상황이다. 홍범도 장군은 1908년 망명 이후 주로 러시아에서 활동했지만,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화된 소련 시대의 러시아 역사를 잘 이해하는 국내 학자가 드물다. 실제로 자유시 참변과 관련해서 소련 ‘적군’이란 말을 사용하는 학자도 있는데 이건 틀린 말이다. 적군은 소비에트화(소련)된 지역의 국군을 지칭하는 말인데, 자유시 참변은 소련 성립(1922) 이전인 1921년에 발생했다. 당시 자유시는 러시아 혁명 세력이 배후에서 영향을 끼치는 자본주의 체제의 원동공화국에 속해 있었다. 독립군이 ‘적군’에게 학살당했다는 건 틀린 말이다. 자유시 참변 당시 무장해제 작전을 실행한 병력은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과 고려혁명군 총사령관 칼란다리시비리의 코카서스 기마병대라고 해야 맞다. 이처럼 용어조차 잘못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배경 지식이 부족해서 실수하는 경우도 있고, 홍범도 장군을 ‘공산세력’으로 덧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잘못된 용어를 쓰기도 한다.
-자유시 참변의 경우 홍범도 장군이 직접 개입하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다만 이후 체포된 독립군을 처벌하는 재판위원으로 참여했다.
▲1921년 6월28일 자유시 참변 당시 사할린의용대 측 장교 70여명이 체포됐다. 이르쿠츠크로 압송되던 중 탈출하다가 죽거나 도주한 이들을 제외한 50명이 재판을 받았다. 당시 홍범도 장군이 재판위원이었던 건 맞다. 자유시 참변이 중앙(러시아 공산당)의 수락하에 벌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수습에 신경 썼던 것 같다. 그렇다고 가해자 편에 선 것은 아니다. 자유시 참변 3개월여 뒤인 1921년 10월, 자유시 참변의 책임자인 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장 슈미야츠키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무력 진압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허재욱(허근)과 홍범도의 참모 출신인 이병채를 모스크바(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로 파견하는데, 이들은 가해자 측의 의도와는 다르게 독립군이 희생된 사실을 알리며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당시 허재욱과 이병채는 홍범도 장군을 파견할 경우 독립군이 희생된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것을 우려한 가해자 측이 자신들을 대신 보냈다고 밝혔는데, 이런 내용이 담긴 보고서가 현재 러시아 국립 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자유시 참변 당시 체포된 독립군은 ‘반혁명’ 혐의로 사형 처분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후 재판에서 8명이 징역 1~2년, 24명이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홍범도 장군의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나.
▲당시 홍범도 장군은 재판에 영향을 끼칠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사실 홍범도 장군은 가해자 측에 이용된 측면이 있다. 독립군 대장 가운데 봉오동·청산리 두 전투에 모두 참전한 건 홍범도 장군이 유일했기에 가해자 측은 그런 상징성을 이용하려 했고,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을 중앙의 동의를 얻고 진행된 일로 여겨 순응한 면이 있다. 하지만 재판이 열리기 약 2주 전, 국제공산당 조선문제위원회는 ‘고려공산당 파쟁 문제와 자유시 참변에 대한 결정서(1921년 11월15일)’를 통해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해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가해자 측은 재판을 진행해 사실상 사건을 서둘러 종결시키고자 했다.
-다만 자유시 참변을 일으킨 쪽에서 무력 진압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내놓은 다수의 성명서에 홍범도 장군을 포함한 독립군 지도자들의 이름이 들어 있다.
▲저도 그 부분이 의아했는데, 2021년 러시아 국립 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에서 답을 찾았다. 홍범도 장군이 최진동, 김동한과 함께 1922년 2월 소비에트정부 군정의회 참모장에게 제출한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 등 독립군 대장들은 성명서 서명을 거부했지만, 가해자 측이 임의대로 이름을 넣었다며 이런 행위를 강력하게 규탄하는 내용이 나온다. 서명이 위조됐다는 이야기다. 그간 이 성명서들의 존재로 홍범도 등 독립군 대장들의 행적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최근 러시아 자료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다.
-그 외 러시아 자료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 있나.
▲그간 자유시 참변이 ‘동족상잔’으로 표현됐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28일 오후 4시경부터 짧게는 4시간 반가량, 길게는 12시간 동안 장갑차와 기관총, 대포로 무장한 원동공화국 제2군단 제29연대 병력 1000여명과 고려혁명군 총사령관 칼란다리시비리 직속 기마병대 500명이 독립군(사할린부대)을 무장 해제한 사건이다. 당시 진압군은 시간대별 매우 상세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어느 부대에서 몇 명이 동원되어 진압에 나섰고, 도주 병력을 장갑차와 기마병이 어떻게 추격했는지까지 자세히 적었지만, 독립군이 동원됐다는 내용은 없다.
-자유시 참변과 관련해 홍범도 장군은 레닌에게 ‘보고’하러 모스크바에 가서 금화와 권총 등을 선물 받았다. 일각에서는 자유시 참변에 공을 세워 레닌에게 치하받은 것으로 평가한다.
▲홍범도 장군이 레닌을 만난 건 1922년 1월 하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극동민족대회)에서였다. 다만 1921년 11월 국제공산당 조선문제위원회에서 이미 진상 규명과 체포된 독립군의 석방이 결정됐다. 자유시 참변과 관련한 레닌의 물음에 홍범도 장군이 몇 마디로 답했다는 ‘홍범도 일지’ 내용을 토대로 홍범도 장군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레닌은 이미 자유시 참변과 관련한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만난 거다. 선물은 자유시 참변 가해자 편에서 공을 세웠다고 준 게 아니다. 이런 내용을 ‘홍범도 장군’ 개정판에서 자세히 보충할 예정이다.
-그럼에도 당시 독립군 사이에서도 홍범도 장군의 행동이 반발을 낳은 듯하다. ‘홍범도 일지’에 보면 자신을 비판하는 김창수·김오남과 싸움을 벌이다 총으로 쏴 죽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무래도 피해자 쪽에서는 섭섭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홍범도 장군은 1923년 8월 모스크바로부터 이르쿠츠크를 거쳐 하바롭스크에 왔을 때 이전 사할린의용대 대원 김창수와 김오남이 자신을 해코지하려 하자 사살했다고 ‘홍범도 일지’에 밝힌 바 있다. 홍범도 장군이 가해자 편에 섰다고 해서가 아니라 그들 관점에서 수수방관했다는 섭섭함이 컸던 듯하다.
- 홍범도 장군은 1923년 레닌을 만난 이후 연해주에 가서 살면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가 없었던 것 같다. 청산리 전투 동지인 이범석은 자서전을 통해 자유시 참변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홍범도 장군이 죽었다고 쓰기도 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의 나이가 50대 후반이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령이었다. 직접 무장투쟁에 나서기보다는 젊은 청년들 상대로 독립운동을 고취하며 살아간 듯하다. 임시정부에 합류하기에도 현실적 여건과 걷는 노선이 달랐다.
-홍범도 장군은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런 점은 홍범도 장군이 사상적으로 공격받는 빌미가 되고 있다.
▲당시는 1924년 레닌의 죽음 이후 스탈린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과도기 상황이었다. 1930년대 스탈린 독재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홍범도 장군이 입당한 소련공산당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스탈린 공산당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소련은 미국과 연합해 독일·이탈리아·일본과 대항하는 쪽이었다. 현실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할 수 없는 노년의 홍범도 장군으로서는 공산당 입당이 소비에트 사회에서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것과 관련해 정부나 육사, 국방부로부터 조언 요청을 받은 적이 있나.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이전을 어떻게 보나.
▲저를 포함해 주변 역사학자들로부터 관련 조언 요청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좀 더 좋은 대접을 하기 위해 흉상을 옮긴다고 하는데 배척해야 할 ‘공산당’ 낙인을 찍어 놓고 옮기는 게 좋은 것인지 묻고 싶다. 역사적 사실을 먼저 파악하고 그에 기반해 설명하고 설득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먼저 결론을 내고 꿰맞춘 느낌이다. 정치적 이유 때문인지, 자존심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역사적 사실에 어긋났다는 건 분명하다.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남는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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