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혜의 트렌드 2023]각자도생 시대…우리 모두가 '돌봄'의 대상
영유아·고령층 외 보통사람 일상도 대상
편의점이 파출소 역할 하기도
'보편적 돌봄'에 주목할 때
추석 전 긴 연휴의 시작점에서 뉴스레터 ‘까탈로그’를 읽었다. LG전자에서 출시한 신제품을 소개하는 글이었는데, 문지혁 작가의 ‘초급한국어’라는 소설로 시작이 된다. 주인공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데,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가 무슨 뜻이에요?" 선생님은 그 뜻을 그대로 풀어서 이렇게 얘기해준다. "Are you in peace?" 서로의 ‘PEACE’를 묻는 인사라니. 까탈로그의 에디터는 이 문장을 보고 한국인의 인사말이 꽤 다정하고 거룩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비단 소설에서만이 아니다. 서로의 안녕을 묻고 구성원을 보듬는 ‘돌봄’이 중요해지는 요즘이다. ‘트렌드코리아 2024’에서는 ‘돌봄’이 가족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 역량으로 확대되고 있는 현상을 ‘돌봄경제’로 명명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영유아돌봄’ ‘고령층케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도 돌봄의 대상으로 포함해 돌봄의 개념을 확장했다는 것이다. 무언가가 부족해서 채워주는 게 아니라, 그냥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 기대는 트렌드가 나타나고 있다는 뜻이다.
편의점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골목마다 24시간 불을 밝히는 편의점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돌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편의점 CU는 2017년부터 지역사회의 ‘파출소’ 역할을 맡고 있다. 결제 부스 내부나 단말기에 미리 지정된 경찰기관으로 연결되는 신고 버튼은 위급 상황에 간편히 누를 수 있다. 2020년부터는 경찰청과 편의점이 함께 아동학대 예방 및 신고 활성화를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아동학대를 피해 거리로 나온 아이들에게 편의점 불빛이 일종의 등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많은 지방자치단체들도 1인 가구의 돌봄사각지대를 살피는 데 편의점을 활용하고 있다. 영등포구는 지역 내 편의점과의 민관 협력을 통해 복지사각지대 위기가구 발굴을 위한 주민 접점 홍보활동을 강화한 적이 있으며, 동두천시는 관내 편의점과 연계해 경제적 어려움으로 결식의 우려가 있거나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한 저소득가정을 발굴하는 정책을 펼쳤다.
최근 골목의 카페, 술집, 독립서점 등이 주민들의 안녕을 챙기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서울 한남동 남산맨션 1층에 있는 보마켓은 생활제품들을 판매하고 간이 식당을 겸하며 따뜻한 마을 카페와 같은 친근한 분위기를 동시에 지향하는 ‘생활밀착형 동네 슈퍼마켓’이다. 가까운 식료품점이 자전거나 차를 타고 어느 정도 나가야 하는 외떨어진 아파트 단지에 위치한 특성상 누구나 오고가며 들를 수 있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다.
주민들의 모임 장소가 되기도 하고, 동네 강아지의 생일 파티가 열리거나, 주말 아침 가족들이 모여 브런치를 즐기는 공간이기도 하다. 학교나 학원을 마친 아이들이 잠시 들러 간식을 사먹으면서 부모를 기다리는 행동도 환영받는다. 동네의 맥락을 반영한 동네 커뮤니티인 셈이다.
빨래방도 비슷한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부산 산복도로에 위치한 ‘산복빨래방’은 동네 주민들이 실제로 빨래도 하면서 동시에 소통할 수 있는 거점의 역할을 했다. 3개월 동안 진행된 단기 프로젝트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빨래방을 사랑방 삼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는 부산일보에서 기획기사로 진행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시대에 ‘빨래’라는 매개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안녕을 물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특히 1인 가구가 많은 동네에서는 단골 술집에서의 한 잔, 자주 가는 카페 사장님과의 짧은 대화 자체가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오프라인 접촉보다 온라인 접속이 더 잦은 시대에 나의 안부를 물어봐주는 대상이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내 집 근처에 위치한 단골가게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단골가게 만들기가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안식처를 만들고 싶은 젊은 세대의 마음이 반영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중고거래 플랫폼으로 시작한 ‘당근마켓’도 동네를 기반으로 ‘돌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사례다. 최근 당근마켓은 ‘당근’으로 사명을 변경했는데, ‘당근마켓’이 근처에서 구매할 수 있는 N차 신상 커머스만을 지향했다면, 이제는 ‘근처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쓰던 물건을 나누고 맛있는 빵집을 알게 되고 새로운 자전거 친구를 만드는 등, 이웃과 조금은 가깝게, 조금은 느슨하게 함께 사는 법을 매개하는 서비스로의 확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당근은 사람들이 동네를 기반으로 취미모임을 만들고 관계를 맺는 장(場)으로 역할이 확장되는 추세다.
외로움이 지배하는 시대다. 편의점, 빨래방, 동네 카페 등이 코로나 기간에 단절됐던 개인을 잇고, 서로의 안녕을 염려해주는 소통의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돌봄이 영유아, 고령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서비스임을 시사한다.
매사추세츠대 경제학과 교수 낸시 폴브레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서, 자본주의 경제에서 성장을 추동한 원동력이 자신의 이윤을 좇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면, 개인주의 사회에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경제적 조건은 다른 사람을 돌보려는 ‘보이지 않는 가슴’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개인이 모래알처럼 파편화되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돌봄’의 대상은 우리 모두를 의미한다. 앞으로 필수적인 영역으로 자리 잡을 ‘보편적 돌봄’의 개념을 주목해야 할 때다.
최지혜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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