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남조 타계, 나는 시인을 이렇게 기억한다
[김성호 기자]
시인 김남조 별세, 짤막한 뉴스가 휴대폰 화면 위를 지나갔다. 또 한 명 대단한 문인이 져버린 것이다. 한국 문단은 그녀를 대신할 시인을 아직도 갖지 못하였는데, 시간은 흐르고 별은 떨어지니 마침내 그렇게 되고 말았다.
김남조 시인은 1927년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태어나 약관을 조금 넘긴 1948년 등단한 시인이다. 그로부터 한평생 한국과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니, 적어도 사랑에 한한한 김남조 만큼 맑고 정한 시를 써온 이도 많지는 않을 테다. 지난 10일, 향년 96세로 세상을 하직한 시인. 그러나 김남조 시인은 내게도 특별한 문인이어서, 그 죽음을 앞에 두고 글 한 편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지난 수년 간 비우고 또 비워왔지만 내 서재엔 여전히 500권 가량의 책이 들어 있다. 약 20칸이 될 책장 칸 가운데는 특별히 아끼는 책이 자리한 곳이 몇 칸 쯤 있는데, <그대들 눈부신 설목(雪木)같이>란 제목의 에세이집도 그 안에 들었다.
▲ 그대를 눈부신 설목같이 책 표지 |
ⓒ 삼중당문고 |
사랑의 시인 김남조, 그녀가 사랑한 시와 만나다
나는 이 책을 십여 년 전에 처음 읽었다. 지금으로는 낯선 세로쓰기로 쓰인 데다 곳곳에 한자가 들어박혀 좀처럼 손이 가지 않던 것을, 그래도 책장에 든 책은 모두 읽어보겠다는 일념으로 도전한 것이 대학교 재학 중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수백 권의 책을 헌 책방에 팔아 치우는 동안 이 책만큼은 언제나 안전한 위치를 차지했으니, 그건 이 책이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는 이들은 알겠으나 <그대들 눈부신 雪木같이>는 김남조 시인의 명저로 손꼽힌다. 단순한 시집이 아니라 시인 본인의 시세계가 어떠한 모양인지를 그대로 내보이는 친절하며 격조 있는 에세이집인 때문이다. 사랑의 시인이라는 별칭 그대로, 에로스를 넘어 아가페에 이르는 사랑의 단상들이 여러 글 가운데 진하게 묻어난다. 특히 릴케와 하이네, 브라우닝 부부 등 서양 문학의 거장들의 시세계를 감성적으로 소개하여 외국 시를 어려워하는 독자들에게 낭만적으로 소개하는 대목 또한 흥미롭다.
김남조 시인의 안목은 과연 대단해, 당시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시까지도 이 에세이집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최근 개봉한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 <어파이어(2023)>에 등장하는 하이네의 시 '아스라'는 독일에서는 제법 알려진 명시임에도 한국에선 번역된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밤마다 사루탄공주는 / 눈 같은 대리석에 푸르러이 물 뿜는 분수 가로 가서 / 흰 물방울을 찰랑찰랑 튀기며 목욕을 한다. // 그때마다 공주의 건장한 노예는 / 뒤돌아서서 물소리를 들으며 / 목욕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 하루하루 여위어 창백해지면서 // 어느 날 공주는 / 빠른 말투로 이렇게 물었다. / 네 이름은 무엇 그리고 네 종족은? // 예, 저는 마호멧 족속으로 / 사랑을 하면 / 그 갈망에 죽고 마는 / 아스라입니다.
-아스라, 하인리히 하이네
시인의 시세계가 오늘과 이어지기를
뿐만 아니다. 나는 시인의 에세이를 통하여 브라우닝 부부의 절절한 사랑을, 또 이루어지진 못했으나 기욤 아폴리네르의 폭발하는 애정과 만났다. 세계의 수많은 시인과 그들이 쓴 시, 그 시에 얽힌 사연까지를 흥미롭고 사려 깊게 소개하는 작품집으로 이만한 책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현대에 이르러 새로 출판되지 못하고 일부 도서관에서나 겨우 구할 수 있다는 점은 몹시 아쉬운 일이다. 독서가에겐 헌책방에서조차 구하기 어려운 명저로 기억됨에도 수많은 출판물이 쏟아지는 이 시대의 대중들과 만날 길이 단절됐다는 것이, 그녀의 시가 그저 오래되고 낡은 무엇쯤으로 여겨지며 잊혀져가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비단 이 책만이 아니다. 시인의 글은 참으로 단정하고 일관성이 있다. 더 크고 본질적인 사랑에의 집요한 추구를 누군가는 특정한 종교의 정취가 강하다며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신앙을 삶의 자세로 받아들여 죽기까지 실천하였다는 점에서 삶의 자세이며 사상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신앙은 설명으로 풀 수 없고, 사랑은 논리로 가려내지 못합니다. 왜냐고 물을 것도 없이 믿음이란 말로 키우는 나무가 아니며, 사랑은 지식으로 익히는 열매가 아님을 우리는 족히 짐작하는 바입니다.
- 김남조, <그대들 눈부신 雪木(설목)같이>, '어찌나 긴 樂章(악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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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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