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여만에 출옥, 감옥 안팎이 다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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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은 악명 높은 서대문감옥에서 힘겨운 옥고를 견디었다.
만기를 3개월 앞둔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되었다.
왜냐하면 반도 3천리가 모두 감옥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우리 민중들이 지금 자기들의 집에 살고 있지만 감옥에서 살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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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기자]
▲ 묵암 이종일 선생 |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
이종일은 악명 높은 서대문감옥에서 힘겨운 옥고를 견디었다. 만기를 3개월 앞둔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되었다. 오세창·권동진·최린·김창준·함태영·한용운과 함께였다. 풀려 나왔지만 바깥 세상은 감옥 안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감옥속은 왜 이다지도 한기가 드는지. 사식이 들어오고 있었으나 조금도 입맛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유의 몸이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반도 3천리가 모두 감옥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우리 민중들이 지금 자기들의 집에 살고 있지만 감옥에서 살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을 때까지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런데 무엇이 두렵다고 몇몇 대표란 자들은 통곡을 하거나 후회를 할까. 그들이 나가면 변절할 우려가 없다고 누가 단언하겠는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천리 강토를 감옥으로 느끼지 않고 사는 자는 우리 동포가 아닐 것이다. 친일파, 관료, 변절자 같은 망국배 외에 누가 그렇게 안락하게 생각한다는 말인가.(1920년 1월 31일자)
그의 말대로 '반도 3천리가 모두 감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일제는 조선에서 무단통치를 하고자 막강한 병력을 투입하고 각종 법제를 통해 얽매었다.
당시 조선에는 조선 주둔 일본 정규군 2만3천여 명, 일제 헌병경찰 1만3천3백80명, 조선총독부 관리 2만1천 3백12명, 34만 명의 일본인 이주민 중 무장 일본이주민 2만3천3백84명 등 약 8만1천76명이 있었다. 일제는 이밖에도 언제든지 한국에 증파할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을 완벽하게 통치하고자 전국 수천 개의 일본군 주둔소와 헌병·경찰관 주재소와 조선총독부 행정조직을 거미줄같이 늘어놓아 총검으로 식민지 무단통치를 자행하고 있었다. (주석 72)
일제는 1907년 9월 3일 이른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제정하여 한국인의 총기 소지나 운반을 철저히 탄압하고, 병탄 이후에는 이 단속법을 더욱 강화하였다. 한국인은 철저히 무장해제된 상태이어서 산짐승이 날뛰어도 이를 처치할 총기 하나도 없었다. 박은식은 이를 두고 "한국인은 일제의 탄압으로 '촌철(寸鐵)'도 갖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그가 민족운동을 하면서 크게 의지하고 정신적·물질적으로 지원받았던 의암 손병희가 1922년 5월 19일 순국하였다. 감옥에서 병세가 크게 악화되었으나 일제는 운명 직전에 병보석으로 풀어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62세로 눈을 감았다. 결국 옥사나 진배 없는 죽임이었다.
의암 성사의 유업과 그리고 동학 이래 면면히 이어지는 시대정신은 문명화된 자주독립국가 건설이었다. 그것이 곧 3·1혁명으로 발현되었다. 일제의 폭력으로 3.1혁명은 좌절되었지만 불꽃이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3월 1일의 대한독립만세운동은 생각건대 분명히 우리의 정당한 의사의 발로이며 자유·정의·진리의 가르침이다. 이 운동은 우리나라 2천만의 대한측이 정의와 인도의 깃발을 높이들고 근대적 충(忠)과 신(信)을 갑옷으로 삼고 붉은 피를 포화로 대신한 창세기 이래 최총의 맨손운동이었다. 그리고 세계무대에서 활동한 특기할만한 민족독립운동의 가장 신성한 대명사이기도 하다.(1919년 3월 7일자)
출옥 후 그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수형기간 중 그의 언행에서 '요시찰'의 딱지가 붙였기에 감시는 더욱 심했다. "비록 만세운동 후 즉시 체포되어 들어갔으나 독립운동은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신명을 바쳐 계속할 것이라고 당당히 대답했다. 이에 일본 경찰로부터 '이종일이라는 자는 지독한 악질이로구나' 하는 욕설을 한두번 먹은 게 아니다."(1919년 3월 2일자)
그는 3년여의 옥고와 63세의 나이 그리고 일제의 무자비한 학살·고문·방화·수배 등으로 인한 깊은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는 사회의 분위기를 살피면서 다음 행동을 준비하였다.
주석
72> 신용하, 『3ㆍ1운동은 누가 왜 어떻게 일으켰는가.』, 『신동아』 198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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