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댐 준공 50년과 막국수·닭갈비

전정희 2023. 10. 12.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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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용수·홍수 걱정 줄이고 K건설 토대 마련
1만8000여 수몰 실향민과 길 끊긴 오지 낳아

1973년 10월 15일, 강원도 춘성군 신북면(현 춘천시 신북읍) 천천리 산4번지에 엄청난 규모의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는 국내 최고의 삼일빌딩보다 높은 123m나 되고, 길이는 530m에 달했다. 저수량은 29억t으로 공인 국제규격 수영장 140만 개의 물을 채울 수 있다.

소양강다목적댐은 완공 당시 동양 최대의 사력(沙礫)댐이었고, 지금도 세계 5위를 자랑한다. 사력댐은 가운데 점토를 채우고 주변에 자갈과 모래로 다진 뒤 돌을 쌓아 만드는 방식이다. 

여기에 들어간 흙과 돌은 1728만t으로 20㎏짜리 8억6000만 포대 분량이다. 이를 한 줄로 늘어놓으면 53만5000㎞에 이르러 지구 둘레를 13바퀴 돌고도 남는다.
준공 50주년을 맞은 소양강댐 전경. 저수량은 국내 최대인 29억t으로 '내륙의 바다'로 불린다. 사진=춘천시 제공 

이날 준공식에서 김종필 국무총리는 “역사상 물을 잘 다스린 민족은 흥했으나 그렇지 못한 사회는 쇠잔했다”면서 “정부는 소양강댐 건설을 기점으로 4대강 유역 수자원종합개발계획을 수립, 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에 대규모 댐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소양강댐은 경부고속도로, 서울지하철 1호선과 함께 박정희 시대 3대 국책 사업으로 꼽힌다. 발전량 1위는 1985년 완공된 충주댐에 내줬지만 저수량은 여전히 국내 최대다. 현재 하루 1100만 명이 쓸 수 있는 332만t의 물을 공급하고 연간 43만5000명이 사용하는 465GWh의 전력을 생산한다.

소양강댐 건설 계획을 처음 발표한 것은 1960년 장면 내각이었다. 춘천댐, 섬진강댐과 함께 입안했으나 예산이 부족한 데다 군(軍) 작전상 곤란하다는 이유로 섬진강댐만 계획대로 추진했다.

이듬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추진하려면 발전 시설과 공업용수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보고 춘천댐과 소양강댐 건설을 다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때마침 대일(對日) 청구권 협상도 진행돼 재원 마련의 길이 열렸다.

1962년 11월 정부는 압록강의 수풍댐을 건설한 일본공영(日本公營)과 기술조사 및 설계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일본공영은 콘크리트댐을 제안했다. 1960년 기초조사에 나선 미국의 건축업체 스미스그룹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 일부를 소양강댐에 투입한다는 방침이 세워지자 건설 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1967년 2월 시공사로 현대건설이 낙찰돼 4월 착공식과 함께 진입로 공사에 들어갔다. 

현대건설은 댐 건설 경험이 없어 일본공영의 설계를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음에도 정주영 사장은 콘크리트댐 방식을 반대하고 나섰다. 

국내 시멘트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해 일본에서 들여와야 할 뿐만 아니라 강원도 산골까지 운반할 방법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사력댐을 건설하면 현지에서 자재를 조달할 수 있어 공사비가 대폭 줄어드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사력댐은 물이 넘치면 붕괴 위험이 크고, 건설 과정에서도 홍수에 토석이 유실될 가능성이 높다는 약점이 있었다.  

건설부와 수자원개발공사(현 한국수자원공사·K-water)는 정주영의 제안을 듣고 펄쩍 뛰었다. 그러나 포병 장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폭격에 사력댐이 훨씬 안전하다고 판단해 정주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본격적인 댐 공사는 1968년 5월 시작됐다. 32t 덤프트럭을 비롯해 롤러(굴림대), 진동다짐기, 스커퍼(배수기), 굴착기 등 최신 장비가 동원됐다. 이 중 대부분은 국내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착공 6년 반 만인 1973년 10월 15일 준공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한국수자원공사 제공

착공하던 해 정부 예산의 19%가 넘는 318억7,000만 원의 공사비가 들었고, 연인원 600만 명의 인력이 투입됐다. 공사 기간 4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대부분 중장비에 의한 사고였고 홍수 산사태로 3명이 희생됐다.

소양강댐 등장으로 전력 생산량과 용수 공급 능력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은 물론 수도권이 만성적인 홍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공사 능력을 인정받은 현대건설은 이후 중동, 동남아, 아프리카 등의 대형 프로젝트 수주에 잇따라 성공함으로써 세계적인 건설사로 도약했다.    

이미 1965년과 1967년 준공된 춘천댐과 의암댐으로 ‘호반의 도시’라는 낭만적인 별칭을 얻은 춘천은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소양호가 생겨나 관광객이 늘어났다. 

소양강댐 연간 방문객은 200만 명을 헤아리고 이 가운데 외지인 비율이 58%에 이른다. 특히 소양강댐 물을 방류할 때는 이를 보려는 인파가 몰려든다. 지난 50년 동안 방류 횟수는 21차례에 불과하다.  

소양강댐 선착장에서 유람선으로 연결되는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의 천년고찰 청평사도 가족 나들이와 연인 데이트 인기 코스로 떠올랐다. 1980년대 초에는 양구와 인제까지 가는 여객선도 운항했으나 인근 도로가 확충되면서 모두 중단됐다. 현재는 춘천시 북산면 조교리로 가는 여객선만 오가고 있다.      

춘천의 막국수와 닭갈비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얻은 것도 소양강댐 덕분이다. 건설 당시 지역민들은 전국에서 모인 건설 기술자와 인부들에게 향토음식을 팔았다. 이 가운데 막국수와 닭갈비가 인기를 끌어 소문이 났고, 준공 뒤 이곳을 찾는 관광객에게도 호평을 얻어 대표 음식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소양호는 국내 담수호 가운데 가장 깊고 물이 고산지대에서 곧바로 흘러내려와 수온이 낮다. 이를 취수해 찬물에서만 사는 송어를 기르는 양식장도 많이 생겨났다. 반면 농업용수는 춘천시 우두동 온수지에 임시로 물을 가둬 햇볕으로 수온을 높인 뒤 공급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1월 25일 소양강 담수식에 참석한 뒤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K-water는 연중 7℃ 안팎을 유지하는 수심 130~150m 심층수를 데이터센터 설비 냉방에 활용하는 수열에너지 융복합 클러스터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소양강댐이 반세기 동안 드리운 그늘도 크고 짙다. 춘성(춘천시로 편입), 인제, 양구 3개 군 50.21㎢가 물에 잠겨 주민 1만8546명(3153가구)은 고향을 떠나야 했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이어서 항의도 제대로 못했고 보상금도 턱없이 적었다.  

육지 속 섬이 생겨났는가 하면 차로 40분이면 갈 수 있던 길이 2시간 30분으로 늘어난 곳도 있었다. 주변 지역이 자연환경보전지역으로 묶여 개발이 제한되는 바람에 재산상 손실을 입은 주민도 적지 않았다.   

춘천시와 K-water는 늦게나마 소양강댐 수몰 지역 실향비 건립에 나서 13일 제막식을 열기로 했다. 지난 9일부터는 서울 청계광장과 춘천 상상마당에서 소양강댐 준공 50주년 기념 이벤트를 열고 있으며, 서울 용산역과 춘천역 구간에 지난달부터 3개월간 'ITX 청춘 소양강댐 50년 열차'를 운행하고 있다. 

◇이희용
연합뉴스에서 대중문화팀장, 엔터테인먼트부장, 미디어전략팀장, 미디어과학부장, 재외동포부장, 한민족뉴스부장, 한민족센터 부본부장 등을 역임하고 한국언론진흥재단 경영이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세계시민교과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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