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마약과의 전쟁, 성패는 가격에 달렸다
지난달 8일 경찰 마약수사관들 사이에서는 “영등포경찰서 대박 터졌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영등포서에서 이날 필로폰 27.8㎏(92만6000명분, 834억원 상당)을 압수했기 때문이다. 합성마약도 아닌 순수 필로폰을 수십㎏ 단위로 압수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문 일이다. 경찰은 추적 끝에 한국·중국·말레이시아 3국에 걸친 대규모 마약 유통조직의 실체도 확인했다.
주범 검거를 위해 보도가 유예돼 지난 10일 알려진 이 사건의 반향은 크지 않았다. 마약 사건이 일상이 됐기 때문이다. 4월 강남 학원가 마약음료 사건, 9월 서울 용산의 집단 마약파티 참석 경찰관 추락사 등 충격적 마약 사건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마당에 필로폰 대량 압수가 특별히 눈에 띄는 일이라고 하긴 어렵다.
더욱이 역대급 마약 압수 사건은 앞으로 자주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국내 마약생태계가 날이 갈수록 견고해지고 있어서다. 지난해 마약사범(1만8395명)은 2021년(1만6153명) 대비 13.9% 늘어났다. 더 심각한 건 세부지표다. 마약류 압수량은 51.4%(377㎏→571㎏), 밀수사범이 72.5%(807명→1392명) 폭증했다. 투약자보다 공급책이, 마약사범보다 유통량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공고한 생태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건 마약에 책정된 가격이다. 암거래 시장의 마약값에는 원가·물류비, 거래에 따른 위험비용 등이 종합적으로 반영된다. 최근 국내 필로폰 1g 소매가는 60만원 전후로 책정돼있다. 2010년대 100만원에서 40%가 떨어졌다. 최저임금(9620원)은 2010년(4110원) 보다 두 배 넘게 오른 걸 감안하면 사실상 폭락이다. 미국(1g당 5만8000원)·태국(1만7000원)의 필로폰 값이 저렴해 가격이 더 내려갈 여지도 있다. 진입 장벽을 낮춘 마약은 신규 수요를 창출한다. 경찰의 4~7월 집중단속에서 20대(30.9%)와 30대(21.8%)가 전체 마약사범의 절반 이상을 기록했다. 한 경찰 간부는 “아무리 잡아도 마약값이 계속 떨어지는 걸 보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다”고 한탄했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마약과의 전쟁’을 강조해왔다. 4월 전례 없는 규모의 범정부 마약범죄 특별수사본부를 편성한 데 이어, 6월에는 이를 확대·개편했다. 전방위 단속으로 마약 유통의 위험비용을 높여 궁극적으론 마약값도 올리겠단 계산이다. 정책 성패도 결국 가격에 달렸다. 마약사범 검거 홍보보다 ‘마약값이 크게 올랐다’는 발표를 볼 수 있길 기대한다.
한영익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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