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플러스] 도로 확장 하겠다고… 40년 이상 된 나무를 자른다고요?
“이거 봅써. 죄다 잘라버려 더운데 그늘도 없고, 보기도 안 좋고, 뽑아놓고 이렇게 다시 작은 나무를 심은 건 왜인지 모르쿠다.”
지난 9일 제주도 제주시 삼도1동 한국병원 맞은편 버스 정류소에서 만난 고모(67)씨는 나무가 다 어디로 갔는지 묻는 기자 질문에 화단에 식재된 묘목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고씨는 “가로수 성목 수십 그루를 잘라내더니 얼마 뒤 묘목을 심었다. 도로공사를 위해 자른 줄 알았는데 다시 심은 걸 보면 공사를 취소한 건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며 “이 나무를 언제 키워 그늘을 볼 것이냐”고 안타까워했다.
가로수 벌채를 둘러싼 논란이 제주도의 주요 이슈가 되고 있다. 도로 확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공사 구간 내 가로수를 베면서 마을 주민은 물론 도민사회 반발이 크다.
최근 논란이 된 곳은 제주시 서광로 일대다. 제주도가 ‘제주시 광양사거리~연동 입구’ 3.1㎞ 구간에 ‘가로변 버스차로’를 ‘중앙버스차로’로 바꾸는 공사를 추진하면서 지난해 서광로 구간 가로수를 무더기로 베어냈다. 공사 구간에는 담팔수, 동백나무, 배롱나무 등 교목과 관목 705그루가 있었다. 도는 이 가운데 정류소가 들어설 지점에 위치한 105그루를 잘라냈다.
시민사회단체는 즉각 벌채 중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불똥은 도가 추진하는 중앙버스차로제로도 튀었다. 공항로와 중앙로에 추진한 1단계 중앙버스차로제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주민 의견수렴 없이 가로수 700그루 벌채를 추진했다는 사실에 도민사회는 분노했다. 제주도가 추진하는 한해 100만 그루 나무 심기 정책과 맞물려 이중행정 비판으로 이어졌다.
부정적인 여론이 높아지자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지난 1월 해당 부서에 사업의 전면 재검토를 지시했다. 5월 제주도는 양문형 버스 도입을 통해 도로 확장 없는 중앙버스차로제를 추진하겠다는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성목을 잘라낸 자리에는 묘목을 식재했다. 설계 용역 결과에 따라 다시 이식될 나무지만, 날선 도민 여론을 의식해 우선 식재를 진행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제주시 오일장 인근 연동 제성마을은 벚나무 벌채로 떠들썩했다. 제주시가 ‘신광교차로~도두 간 도로구조 개선사업’을 추진하면서 수령 40년의 벚나무 12그루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제주시는 2020년 도로공사를 위해 벚나무 3그루를 주민들과 상의 없이 베어냈다. 주민들은 시청을 찾아 항의했고, 담당 부서는 사전 논의가 부족했던 부분에 대해 사과하며 마을 서쪽 벚나무는 보존하면서 공사를 진행하는 방안을 찾겠다고 했다. 하지만 담당 직원이 인사 발령으로 교체되면서 제주시는 지난해 3월 보존 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남은 벚나무 9그루를 모두 잘라버렸다. 화가 난 주민들은 대책위를 구성해 제주시청 앞에서 집회를 벌였다. 기자회견을 열어 제주시의 일방적 행정 행위를 비판했다. 제주도청 앞에선 3개월간 피켓 시위가 이어졌다. 대부분 60~90세 어르신들이었다.
나무 12그루에 주민들이 거리로 나선 것은 벌채된 벚나무가 40년 전 주민들이 마을로 이주하며 직접 식재한 나무이기 때문이다. 제주공항 확장공사 때문에 고향에서 반강제적으로 쫓겨나다시피 한 사람들에게 벚나무는 새로 안착한 마을의 산 역사이자 고향과 같은 존재였다. 주민들은 성목이 된 나무 그늘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매년 찬란하게 피어나는 벚꽃을 보며 새봄을 맞았다. 결국 주민들은 제주도지사와 면담을 진행한 끝에 마지막 벚나무 그루터기를 돌담을 쌓아 보존하고, 벚나무가 도로공사 과정에서 제거됐음을 기록한 표지석을 세우는 작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하며 3년간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
기후위기로 폭염 일수가 늘고, 걷기나 자연에서의 휴식을 원하는 시민들의 요구가 확대되면서 도심 속 자연인 가로수에 관한 관심은 점점 커지고 있다. 예전에는 상가 간판을 가린다며 전정을 원하는 민원이 주를 이뤘지만, 최근에는 더운데 그늘이 없다며 나무를 더 심어달라는 요구가 증가하고 있다. 가로수 전정이 과도하다거나 가로수 식수대가 너무 좁고 지지대 조임 철사를 제때 제거하지 않아 나무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민원도 늘고 있다.
군사기지 반대 등 굵직굵직한 현안에 집중하던 시민사회단체도 가로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제주참여환경연대는 지난해부터 시민참여단 모집을 통한 가로수 모니터링을 진행하며 가로수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홍영철 제주참여연대 공동대표는 “지난해 제성마을 벚나무 사태 이후 나무와 관련한 제보가 많이 들어와 도민들의 관심을 알 수 있었다”며 “가로수는 자연, 환경의 문제를 넘어 도시계획, 삶의 방식, 도민의 행복과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인 만큼 앞으로도 있을지 모를 행정기관과의 마찰에서 도민 응원을 확보하기 위해 가로수 학교를 운영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제주도도 녹지와 도로 분야의 협업행정 지침을 마련했다. 도로 개설이나 정비 추진과정에서 가로수 식재 또는 제거가 이뤄질 경우 도로 담당부서와 녹지 담당부서가 공유하고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각종 도시개발 과정에서 가로수가 위협 받을 요소는 여전히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野의원 질의자료 훔쳐본 하나재단…카메라에 ‘포착’
- 합판 뜯자 담배 80만갑, 빼곡…호주 밀수출 시도 일당
- 수상한 한인 레스토랑…베트남 변종 성매매 업소였다
- 영유아 시신 40구, 일부는 참수 “본 적 없는 대학살”
- 사장님만 보이게 남긴 리뷰…“환불은 괜찮다” [아살세]
- 안철수측, ‘XX하고 자빠져’ 논란에 “유머로 승화” 반박
- 음료 들고 버스 타려다 거부당하자… ‘홱’ 내동댕이
- 美 104세 할머니, ‘최고령 스카이다이버’ 8일 만에 영면
- 학폭 고발 ‘현실판 더 글로리’ 표예림씨 숨져
- “주유소 직원 ‘혼유’ 실수, 운전자 잘못도 있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