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 탈출구가 없다…이집트 앞 피란민 "들여보내달라"

김민정, 황수빈 2023. 10. 1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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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보복 공습으로 가족을 잃은 두 소년이 슬픔에 잠겨 울고 있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이스라엘 정부는 전쟁을 공식 선포하며 맞대응에 나서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전 미사일이 아닌 장난감을 파는 사람입니다. 왜 제가 집도 직장도 잃어야 하나요."
폭격으로 무너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한 아파트 지하에서 간신히 구조된 주민 압둘라 무슬레(46)는 이렇게 말하며 울먹였다. 차갑게 식은 아기의 주검도 곳곳에서 발견됐다. 10일(현지시간) AP통신 등은 이스라엘의 대규모 보복 공습으로 잿더미로 변하고 있는 가자지구 내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이날 하룻밤 새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거점으로 추정되는 시설 200곳을 폭격했다고 밝혔다. 지난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 직후 이스라엘은 전쟁을 공식 선포한 뒤 전투기, 헬기, 대포 등을 동원해 가자지구에 대한 공습을 계속 하고 있다. IDF 대변인은 "가자지구에 이미 수백 톤의 폭탄이 투하됐다"며 "정확성이 아니라 피해에 방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무자비한 '피의 보복'이 이어지면서 가자지구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민간인의 피해도 속출하고 있다. 가자지구 남부 라파를 비롯한 거리 곳곳에는 사망자의 시신을 운구하는 장례 행렬이 멈추지 않고 있다. 북부 자발리아 난민 캠프에선 사람들이 폭격에 내려앉은 건물 잔해에서 아기의 시신을 끄집어내는 처참한 모습이 펼쳐지고 있다.

일부 팔레스타인 주민은 "이스라엘이 공습을 강화할수록 가자지구에 더는 안전지대는 없다"며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하마스의 전략과 목표에 의문이 든다"고 외국 취재진에게 호소했다.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에 따르면 가자지구 주민 230만명 가운데 이번 전쟁 발발 이후 집을 떠난 피란민은 18만7500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13만7000명은 공습 목표에서 벗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학교 등 대피소 80곳에 머물고 있다. 이미 90% 이상의 대피 공간이 가득찬 상태다.

10일(현지시간)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으로 어린 자녀를 잃은 한 팔레스타인 아버지가 주검이 된 아이의 시신을 천으로 감싸고 장례식장으로 향하고 있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이스라엘 정부는 전쟁을 공식 선포하며 가자 지구 일대를 공격하는 등 맞대응에 나서고 있다. AFP=연합뉴스


오도 가도 못하는 지옥


희생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조속한 탈출이 시급하지만, 이들을 위한 탈출구도 마땅치 않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지난 9일부터 이틀 연속 가자지구 남부의 라파 통행로를 공습했다. 이 통로는 가자지구 주민이 이집트 시나이 반도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육로다. 가자에서 이스라엘로 통하는 에레즈와 케렘 샬롬 루트도 있지만, 이들 통행로는 이스라엘 측이 세운 40m 길이의 장벽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사실상 봉쇄된 상태다.

이집트에서도 이스라엘의 공습이 계속되자 라파 통행로를 폐쇄했다. 라파 통행로 폐쇄를 목격한 한 이집트인은 텔레그래프에 "사람들이 코 앞에 있는 우리 쪽으로 달려오려 했지만, 팔레스타인 쪽 문이 닫혔다.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며 들여보내달라고 소리쳤다"고 말했다.

이집트는 또 다른 고민에 처했다. 가자지구에서 대량으로 난민이 유입될 경우 경제난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집트는 환율 급등과 인플레이션 확대, 외환보유고 부족 등 3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이집트 입장에선 가자지구 난민 수용이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10일(현지시간)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가자지구 주택가 건물 곳곳이 주저 앉아 잿더미가 됐다. 사진은 인공위성으로 바라본 가자 지구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이틀 후면 전기마저 차단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가자지구 주민들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공습을 피해 목숨을 건져도 당장 먹고 사는 게 문제다. 비축해 놓은 통조림 등 식품은 바닥을 보이고 있고, 하루 4시간씩 쓰던 전기마저 곧 차단될 위기에 처했다.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않으면 병원으로 실려온 응급 환자들의 목숨도 위태로워진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도 11일 “가자지구에 있는 병원 (발전기용) 연료가 며칠 내에 고갈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역시 “가자지구의 주요 병원들은 연료 부족으로 폐쇄될 위기에 처한 상태”라며 적십자의 구호 인력이 활동할 여건을 만들어줄 것을 촉구했다.

가자지구 주민들은 이런 상황을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 이후 졸지에 난민으로 전락했던 시절에 빗대며 '제2의 나크바(대재앙)'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팔레스타인 주민 약 70만명은 주변국으로 흩어져 난민이 됐다. 이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5월 15일을 '나크바의 날'로 추도하고 있다. 가자 주민 플레스티아 알라카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나크바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그게 뭔지 완전히 알게 됐다"고 AP에 말했다.


주변국 중재 난색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이 격화하고 있지만, 인근 중동국들은 중재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 정부가 하마스에 납치된 미국인들의 석방 협상에 대한 중재를 카타르에 기대하지만, 카타르는 거절 의사를 밝혔다.

카타르는 친미 국가이지만,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지구에 재정 지원을 하면서 하마스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앞서 2020년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카타르의 중재로 한 달 가까이 교전을 중단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10일 블룸버그TV에 "카타르는 하마스에 접근할 수 있지만, 미국이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다"며 "카타르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제드 빈 모하메드 알안사리 카타르 외무부 대변인은 "지금 어떤 당사자가 중재를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사실상 거부했다.

10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주택과 건물들이 이스라엘군 보복 공습에 폐허가 됐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이스라엘 정부는 전쟁을 공식 선포하며 맞대응에 나서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김민정 기자 kim.minjeong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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