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사별 후… "내 슬픔이 가장 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오상훈 기자 2023. 10. 11. 17: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죽음교육] ⑥사별 가족들 모여 충분한 애도와 공감… 호스피스서 사별돌봄 관심가져야​
병원의 벽면에는 고인과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 걸려 있다./사진=오상훈 기자
5일 방문한 동백성루카병원은 한산했다. 복작복작하지만 특유의 어두운 공기가 깔려 있는 여타 병원들과는 사뭇 달랐다. 이따금 의료진과 보호자들이 의료용 침대를 천천히 옮길 뿐이었다. 복도 벽면에는 액자가 가득했다. 사진 밑에는 연도와 설명이 적혀 있었는데 ‘2021년, 아들과 함께 브이를’과 같은 식이었다.

동백성루카병원은 천주교 수원교구에서 운영하는 호스피스 기관이다. 살리는 일보다는 말기 환자와 보호자들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치료가 중점으로 이뤄진다. 그러다 보니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은 대부분 사별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수반한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 대다수는 이미 겪었거나 앞으로 겪게 된다. 그러나 그 고통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동백성루카병원에서 사별가족들을 만나 물었다.

◇갑자기 췌장암으로 떠난 남편
사별가족실에서 만난 이진희(가명, 49세) 씨는 병원을 마주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남편과 사별했다. 췌장암이었다. 특별히 증상이 있던 것도 아닌데 건강검진에서 4기 소견을 받았다. 진료를 보러 간 대학병원에서 집에는 못 간다고,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보라고 권유했다. 손 쓸 틈이 없었다. 이후 대학병원 입원실에서 잠깐, 첫 번째 호스피스 병동에서 한 열흘, 동백성루카병원에서 16일 정도 있다가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기 전, 이틀 동안 집에 있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엔 그나마 위안이 됐던 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애들이랑 같이 와서 아빠와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고.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본인 스스로 집 문을 나서면 못 돌아오는 걸 알았을 테니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싶기고 하고….” 

진희 씨는 사별 후에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신랑은 성실한 사람이었고 한마디만 하면 알아서 해주는 사람이었거든요. 뭐든지 잘 고치고. 애들한테도 잘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살아왔더라고요.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던 게 가장 미안해요.”

평소 못해줬던 기억들은 죄책감으로 몰려왔다. “출근할 때 일어나지도 않고 밥도 안 해줬는데 지금은 새벽 5시 넘으면 눈 떠지고 새벽 6시에 나가 1시간씩 걸어요.” 그는 호스피스가 보호자들 케어에 좋은 것 같다는 생각도 죄책감으로 이어졌다고 나지막이 말했다.

◇유방암 생존율 높다더니… 마흔살 딸이 떠났다
김경숙(가명, 62) 씨는 지난 5월 딸과 사별했다. 고등학교 영어교사였던 딸은 직장생활을 하다 서른 살에 사범대에 편입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다. 어느 날 가슴에 멍울이 느껴졌고 검사 결과, 유방암을 진단받았다. 당시 경숙 씨는 유방암 완치율이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딸의 유방암은 뼈로 전이된 삼중음성유방암이었다.

삼중음성유방암은 난치성 유방암이다. 표적치료제 사용이 어렵고 재발률도 높아서 예후가 좋지 않다. 암은 야속하리만큼 착실했다. 항암은 듣지 않았고 코로나까지 지나간 뒤 상태는 급격히 악화하기 시작했다. 여러 합병증이 찾아왔고 암은 뇌척수로까지 전이됐다. 방사선 치료가 불가능할 때 쯤 그의 딸은 하루 대부분을 의식을 잃은 채 보냈다. 길어도 3개월이라는 말을 듣고 한 달 후 세상을 떠났다. 만 40세였다.

경숙 씨는 여전히 실감이 안 난다고 말한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떠올려야 했다. “자식을 먼저 보냈다는 슬픔은 제 일이 아니었을 땐 몰라요. 세월호 때도 그렇고 이태원 때도 그렇고 그냥 남의 일이니까 시간 지나면 잊어버리고 그랬는데 막상 이렇게 내 일이 되니까 그때 부모들이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슬픔 어찌할 줄 몰라, “하루 수백번씩 주님 원망”
원체 티내는 걸 싫어한다는 진희 씨는 남편과 사별 후 지인들에게 전과 같이 대해달라고 못을 박았다고 한다. 본인의 감정이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게 싫어서였다. 그렇게 말해놨지만 슬픔은 항상 예고 없이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집에 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러던 와중에 남편이 임종한 동백성루카병원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 사별가족 모임 참가를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집에서는 혼자 가만히 있으면 그냥 눈물이 났어요. 애들이 엄마가 우는 지 안 우는지 눈치를 보고,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쉽지는 않으니까. 여기부터 나가볼까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가톨릭 신자인 경숙 씨는 사별 후 신앙심 때문에 괴로웠다고 회상했다. “종교를 안 가졌으면 모르겠는데 왜 딸을 데려갔냐고 주님 원망도 하고, 그러다가 천국에 간 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뉘우치고 용서를 빌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마음이 왔다 갔다 하니까 정신이 온전치 못할 것 같아 두려웠어요.”   

그는 5년 전, 가톨릭 신자로서 호스피스 교육을 받았던 적이 있다. 사별가족도 호스피스의 치료 대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딸과 사별 후, 가톨릭 주보를 읽다가 프로그램을 발견해 신청하게 됐다. 과거 호스피스 교육도 그렇게 신청한 것이었다고 말한 그는 그때만 해도 자신이 사별가족 모임에 참여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다며 멋쩍게 웃었다. 

동행 8기 모임이 진행 중인 모습./사진=동백성루카병원 제공
◇그냥 같이 울었을 뿐인데…​ "큰 위로였다"
모임에는 같은 표정을 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경숙 씨는 연령대도, 사별한 사람과의 관계도 다양했지만 신기하게도 첫인상은 모두 비슷했다고 말했다. “10명이었거든요. 다들 와서 그런 얘기를 해요. 내 슬픔이 제일 큰 줄 알았는데 남의 슬픔을 들으니까 다들 이렇게 슬프구나. 나만 슬픈 게 아니구나. 솔직히 집에서는 남편, 자식 앞이기도 하고, 장례식 이후 크게 울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거기서는 다들 매순간 우니까 공감대가 생기고, 창피하고 그런 것도 없이….”

모임은 매주 한 번, 3시간 씩 총 8번 진행됐다. 각 모임마다 주제를 갖고 사별의 슬픔에 대해 얘기하거나 고인을 추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명상, 음악 치료, 편지 쓰기 와 같은 프로그램들이 진행됐다. 마지막에는 다 같이 1박 2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난 8월 초에 시작한 모임은 9월 21일에 끝났다.

진희 씨는 특히 자원봉사자들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모임에는 사별가족들 외에 수녀와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했다. “매 시간 저희 얘기를 듣고 울어주셨어요. 모임 갔다가 집에 가면 너무 울어서 머리가 아프고 힘들잖아요. 저는 제 얘기지만 그 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을까. 계속 마스크를 하고 있어서 얼굴도 모르다가 여행 가서 처음 맨 얼굴을 마주한 거예요. 너무 고마웠어요.”

◇장례 끝나면 애도도 끝? “슬픔에 인색하지 말아요”
한국 사회는 애도에 인색한 경향이 있다. 장례식은 사실 행정적인 절차에 가깝다. 고인을 온전하게 기억하고 마음속에 재배치하는 애도는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시작된다. 그러나 3일장 후 일주일가량이 지나면 주변으로부터 “잊어야 네가 산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와 같은 말들이 들려온다. 고인에 대한 사랑과 기억을 끊어내는 과정은 애도가 아니다.

진정한 애도를 위해선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먼저 터져 나와야 한다. 막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들 앞에선 더 어려웠다는 사별 경험자들이 많다. 진희 씨도 그랬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빵 터져버리면 수습할 길이 없을 것만 같아서 꾹 참았다.

동백성루카병원장 윤동출 신부는 사별 후 슬픔이 언제 사그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다. 1~2년 일수도, 평생 갈 수도 있다. 특히 갑작스러운 사별의 경우 트라우마가 심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일상에 지장을 겪지 않을 정도로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 게 중요해요. 돌봄이라고 특별한 게 아니에요.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 이 사람에게는 큰 위안이 되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에 점점 나아지죠. 사별 경험자 분들은 공감하는 바가 많다 보니까 누가 속에서 한 번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 잘 들어주시는 것 같아요.”

그러나 사별가족들이 모일 장소는 드물다. 일단 사별돌봄에 관심을 갖는 호스피스가 별로 없다. 모임을 운영한다고 하더라도 고인에게 안부 편지를 쓰거나 일일 강연으로 끝마치는 곳이 많다. 사별 경험자들이 운영하는 온라인 카페 등이 있지만 직접 만나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호스피스가 우리나라가 들어온 지 60년 이상 됐는데 대만이나 일본에 비해서 아직까지 뒤쳐져 있고요. 산 사람을 돌보는 문제도 해결되지도 않은 곳에서 사별가족을 돌보는 거에 대한 지침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미국에는 돌봄 대상이 부부 사별자와 자녀 사별자, 고령층과 젊은층 등으로 세분화돼있다고 합니다. 사실 동백성루카병원의 사별돌봄도 해외에서 경험했던 사람들이 모여 조각조각 만들어낸 거예요.”

◇“죽음 쉬쉬하지 말고 털어놓을 수 있는 곳 많아졌으면…”
진희 씨와 경숙 씨는 슬픔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 단언한다. 사실 지금도 나아졌는지는 매번 의문이다. 다만 조금씩 옅어질 거라는 믿음 정도는 있다고 덧붙였다. 진희 씨는 인터뷰에 응한 것도 사별모임을 만들어준 병원 측에 고마워서라고 말했다. 모임이 끝나고 모임이 없었다면 더 힘들었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고 한다.

경숙 씨는 모임을 가지면서 그동안 죽음을 너무 회피하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외국 같은 경우는 솔직히 죽음이 무조건 나쁘다기보다는 그거를 기억하고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잖아요. 무덤 같은 것도 집 가까이 있고 공원으로 만들기도 하고. 근데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죽음하고 관계되는 걸 자꾸 회피하려고 그러는 것 같아요. 그래서 모두 입을 닫게 되고. 차라리 이렇게 털어놓고 서로 얘기도 하면 좋은데. 사람 나름일 수도 있지만 이런 모임이 좀 많이 생기면 좋을 것 같아요.”

동백성루카병원 사별돌봄 프로그램은 따로 참가비를 받지 않는다. 다른 병원에서 임종한 고인의 가족들도 참여할 수 있다. 불행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게 천주교의 영성이기도 하고 병원 원칙이라는 이유에서다. 윤동출 신부는 개인적인 체험도 이유라고 덧붙였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치유 받는 분들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만 둘 수가 없어요. 앞으로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별한 분들도 뵈려고 합니다.” 

동행에서 사별의 아픔은 '잊는 게 아니라 잘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사진=동백성루카병원 제공

Copyright © 헬스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