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년 역사 지닌 로마, 그 땅 밟으니 겸허해진 까닭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2023. 10. 1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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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2] 제국은 멸망했지만 도시가 남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의 뜻

[김찬호 기자]

나폴리에서는 계획보다 짧은 일정을 보냈습니다. 비행기가 취소되는 바람이 어쩔 수 없었죠.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에서, 저는 꽤 큰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이 곳은 수도 로마이니까요. 이탈리아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는 최대의 도시니까요.

사실 로마로 향하면서, 저는 파리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럽의 수도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파리였으니까요. 생각해보면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참 달랐지만,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성벽을 지나는 도로
ⓒ Widerstand
 하지만 제가 도착한 로마는, 파리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오히려 파리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도시 같더군요.

파리는 역사가 깊은 도시입니다. 하지만 파리의 도시 경관은 혁명과 전란을 통해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지금 파리의 모습은 대부분 19세기 오스만 남작의 도시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파리는 근대가 만들어낸 근대의 도시입니다.

로마는 다릅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로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였죠. 로마 제국은 거대한 영토를 경영하며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이 시기 로마는 고대 유럽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의 쇠락 
 
 고대 로마 유적
ⓒ Widerstand
 로마 제국은 4세기에 이르러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결국 멸망했죠. 하지만 국가가 멸망해도 도시는 남았습니다.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로마라는 도시의 힘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로마는 한동안 서로마를 멸망시킨 고트 족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지배는 오래 가지 못했죠.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동쪽에는 아직 동로마 제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아누스 대제는 군사력을 동원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했습니다. 동로마는 고트 족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죠.

서로마 멸망 60여 년만에 로마는 다시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은 옛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모두 수복하지는 못했지만, 로마만큼은 동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그만큼 로마라는 도시의 상징성이 중요했던 것이죠.
 
 콜로세움
ⓒ Widerstand
 특히 로마에는 로마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인 로마 총대주교, 즉 교황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서유럽 기독교에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죠. 서유럽에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교황과 로마의 역할은 중요해져 갑니다.

동로마의 영향력이 쇠퇴하자,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손을 잡았습니다. 가톨릭을 믿는 프랑크 왕국의 도움을 받아 동로마의 군대를 몰아냈죠.

프랑크 왕국은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이 땅을 교황에게 헌납합니다. 그렇게 교황이 지배하는 영토인 교황령이 만들어졌죠.

이후 유럽의 여러 전란에도 로마는 그 형태를 대부분 유지했습니다. 교황이라는 강력한 종교적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중세 이후 유럽 국가들은 교황의 종교적 힘을 뛰어넘었지만, 그 뒤에도 무력으로 교황령을 정복하는 것은 분명 꺼려지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로마가 정복되거나 파괴된 것도 역사적으로는 손에 꼽는 일이었습니다. 서로마 멸망기 고트 족의 약탈을 제외하면 16세기 말 카를 5세의 침략 정도일까요.

시내 곳곳에 살아 숨쉬는 고대 로마의 흔적
 
 공원의 오래된 유적
ⓒ Widerstand
 나폴레옹도 로마를 정복했지만, 나폴레옹 몰락 이후 교황령은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그 뒤로 교황령은 프랑스의 도움으로 국방력을 유지했죠.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가 통일될 때, 교황령은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에 병합됩니다. 통일된 이탈리아 왕국은 수도를 로마로 옮겼죠. 그렇게 지금까지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로마라는 도시는 고대 제국의 수도 위에 다시 세워진 근대국가의 수도였습니다. 그 사이 대규모의 파괴나 도시 재건을 경험하지 않은 것이죠. 고대 로마 역시 지금까지도 이 도시를 구성하는 하나의 지층이 되었습니다. 그 지층 위에 현대의 로마가 쌓아 올려진 셈이죠.

그러니 고대 로마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로마 시내 곳곳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상 19세기에 다시 만들어진 파리와는 분명 다른 지점입니다.

로마 시내의 골목에서는 곧게 뻗은 길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길이 늘 구부러져 있어서, 방향감각을 찾기도 힘들 때가 많았죠. 골목 안에서는 지도를 보면서도 길을 잃은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 길을 헤매고 있자면, 금세 작은 광장과 함께 큰 성당이 나타납니다. 로마 시내에는 그 성당들이 랜드마크의 역할을 해 주고 있더군요. 어느새 지나온 성당의 위치를 거점으로 삼아 길을 기억해내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의 의미
 
 산타고스티노 성당
ⓒ Widerstand
 
로마는 도시 구조에서부터 역사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니 물론 오래된 유적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죠. 지나가는 공원에도 고대 로마의 유적을 발굴하고 있었습니다. 숙소로 들어오는 길이면 아주 오래된 성벽을 지나야 했습니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그런 역사의 흔적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매일 오래된 성벽을 지나 출퇴근을 하고, 수백년 전의 사람들이 걸었을 것과 똑같은 골목을 걷고 있습니다. 그 흔적에는 영광도 모순도 함께 서려 있을 것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얘기가 있죠. 무엇을 목표로 삼든, 그 목표로 향하는 길은 다양하다는 뜻입니다. 고대에도 지금도, 로마로 가는 길은 여럿입니다. 그 말은 반대로, 로마에서 나아갈 수 있는 길도 여럿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의 로마도, 다양한 길 가운데 어떤 한 가지를 골라 걷고 있는 것이겠죠.

모든 길이 로마로만 통하는 것이 아니듯, 이것 역시 꼭 로마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도시들은 다양한 갈림길 위에서, 각자의 길을 선택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하지만 로마에서는 왠지 우리가 지나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딛고 있는 도시의 역사성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갈림길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로마는 도시가 가진 수천 년의 지층이, 그대로 온전히 쌓여 있는 도시니까요.

모든 길이 내가 발을 딛고 선 이 도시로 흘러들어옵니다. 그리고 다시 여기서 새로운 길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지금까지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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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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