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UAE의 40조 투자 청구서? 韓 결국 항공노선 빗장 푸나

강갑생 2023. 10. 1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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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레이트항공의 A380 여객기. 사진 EK 홈페이지

막대한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저가 공세로 각국의 항공시장을 공략해온 아랍에미리트(UAE)의 항공사들이 4년 만에 다시 우리나라와의 운항 횟수 늘리기(증편)에 나선다.

이미 UAE 항공사들이 양국 간 노선에서 70% 가까운 승객을 점유한 상황에서 대규모 증편까지 이뤄질 경우 국내 항공사들이 막대한 추가 피해를 볼 거란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UAE 대통령이 조만간 방한할 예정이어서 정부 차원에서 ‘성의 표시용’으로 증편을 수용할 거란 관측이 우세하다.

11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이달 12~13일 서울에서 UAE와의 항공회담이 열린다. 지난 2019년 열린 뒤 코로나19로 인해 미뤄지다가 4년 만에 다시 개최되는 것이다. 항공회담의 핵심 의제는 현재 주 15회씩으로 돼 있는 운항횟수의 증대다.

UAE 항공당국은 운항 횟수를 2~4배까지 늘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지난 2018년과 2019년 열린 항공회담에서도 유사한 요구가 있었으나 국내 항공업계의 피해를 우려한 우리측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UAE “운항 횟수 2~4배 늘려달라”


국내 항공업계가 UAE 노선의 증편에 민감한 이유는 현재 운항 상황에서도 확인된다. UAE의 아랍에미레이트항공(EK)은 현재 두바이~인천 노선을, 에티하드항공은 아부다비~인천 노선을 매일 한 차례씩 오가고 있다.

반면 우리는 대한항공만 두바이 노선을 주 7회 운항 중이다. 그나마 코로나19로 운항을 중단했다가 지난 4월에 재개했다. 나머지 주 8회의 운항 횟수는 수요 부족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좌석공급력도 크게 차이 난다. EK는 현존하는 최대 여객기인 A380(517석)을, 에티하드항공은 B787(327석)을 띄우지만, 대한항공은 상대적으로 좌석이 적은 A330(218석)을 운항 중이다.

에티하드항공 여객기. 출처 에티하드항공 홈페이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2019년 기준으로 해당 노선 승객 15만명 가운데 UAE 측 항공사가 실어나른 승객이 70%에 육박한다. 더 큰 문제는 상당수 승객이 한국인인 데다 최종 목적지가 유럽 등지인 경우가 60%를 넘는다는 점이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유럽행 노선의 경우 UAE 측 항공사들은 국내 항공사보다 30% 가까이 싸게 항공권을 팔고 있다. 국내 항공사는 직항이지만 UAE 측 항공사는 두바이나 아부다비에서 유럽행 비행기로 환승하는 방식이다. 다소 번거롭고 시간이 더 걸리지만, 요금이 워낙 싼 탓에 승객이 늘고 있다.


UAE 항공사 승객 70% 가량 환승객


항공회담에서 2~4배 증편이 이뤄지게 되면 UAE 노선은 물론 국내 항공사들의 유럽 직항노선이 직격탄을 맞을 거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우리가 유럽노선을 늘리더라도 중동항공사가 지금처럼 저가공세로 유럽행 승객을 대거 가져가면 적자를 면키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UAE와 카타르 등 중동지역 항공사로 인한 피해는 이미 다른 나라들에서도 논란이 됐다. 호주의 콴타스항공은 당초 다양한 유럽 노선을 운항했지만, 중동항공사의 진출 이후 경쟁에 밀려 노선을 대부분을 폐쇄했다.

에어프랑스도 중동과 동남아 노선 상당수를 폐쇄했다. 심지어 미국조차도 중동 항공사 진출로 타격이 커지자 주요 항공사들이 정부에 불공정 경쟁에 대한 대책 마련을 호소한 바 있다. 미국 항공사들은 UAE와 카타르 항공사들이 지난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총 66조원의 정부 보조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UAE 노선이 대규모 증편되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유렵행 노선이 큰 타격을 입을거란 전망이다. 연합뉴스


우리 정부도 이러한 피해 우려 때문에 2018년과 2019년 연이어 열린 UAE와의 항공회담에서 UAE 측 항공사의 환승객 유치비율 제한 등 조건을 달며 증편 요구를 사실상 거부했다.

당시에도 원전수출 등과 맞물려 UAE의 증편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외교 라인의 압박이 적지 않았지만 국토부 협상대표단이 국내 항공업계 보호와 불공정 경쟁 우려 등을 들어 수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내 항공사 “증편이 성의 표시용”우려


하지만 이번 항공회담을 앞두고는 항공업계에서 적지 않은 걱정이 나온다.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의 UAE 국빈 방문을 계기로 40조원의 투자약속을 받은 데 이어 조만간 UAE 대통령이 방한할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항공업계 관계자는 “정부 차원에서 2018년과 2019년 때처럼 다른 사업 수주를 위해 증편 등 항공시장 개방을 ‘성의 표시’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며 “다른 산업과 달리 항공시장은 한번 무너지면 회복이 정말 어렵다”고 말했다.

UAE의 증편 요구를 받아들이면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쿠웨이트 등 다른 중동지역 항공사도 동일한 조치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도 나온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도 “추가 증편은 일방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손해를 가져온다”며 “소비자 입장에서도 당장은 저렴한 비행편이 늘면 이득이겠지만 우리 항공사의 직항노선이 폐지돼 경쟁이 없어지면 요금이 다시 오르게 돼 오히려 더 불편을 겪게 될 것”이라고 토로했다.

김주원 기자


회담 준비 과정에서 국토부가 보안만을 내세워 구체적인 일정과 내용 등을 국내 항공사에 뒤늦게 알려준 사실도 확인됐다. 종전에는 항공회담 개최가 늦어도 1개월 전쯤에는 확정되며, 이후 국토부가 2~3주 전에 항공사들에 관련 의견을 요청하고 대응책 등을 함께 논의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채 일주일도 안 남기고 항공사에 회담 개최 사실만 알렸으며, 그나마 개최 일시는 비공개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국내 항공사들이 UAE 측 항공사에서 관련 정보를 듣고는 거꾸로 국토부에 확인 요청을 수차례 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전문가 “일방적, 불리한 증편 안 돼"


전문가들도 우려를 표하고 있다. 김연명 한서대 교수는 “우리 항공사들이 가뜩이나 저가공세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데 상대방 요구만 받아들여 증편을 허용한다면 심각한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며 “특히 유럽 쪽 직항 노선의 타격이 클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 “우리 항공사들이 환승객을 중동 항공사에 다 뺏기게 되면 인천공항 허브화에도 막대한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정 불가피할 경우 증편을 최소화하고 우리 항공사를 보호할 수 있는 조건을 붙여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환승객 유치를 위주로 하는 중동 항공사의 공세가 거셀수록 인천공항 허브화도 차질이 우려된다. 연합뉴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전문가는 “기본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항공편이 늘고 가격도 저렴하다면 소비자 입장에선 이득이 되는 데다 국내 항공사도 어느 정도 경쟁은 감수해야 한다”면서도 “다른 산업의 이익을 위해 반대급부로 항공사의 손해를 초래하는 정책은 문제”라고 말했다.

불공정한 경쟁으로 노선이 폐지될 경우 고용 유지에 악영향을 준다는 지적도 나온다. 항공업계에선 노선(주 7회 운항기준) 1개가 폐쇄되면 일자리가 1500~1900개가량 사라진다는 통계도 나온다.

실제로 유럽연합(EU)에선 중동 항공사와의 경쟁 여파로 2010년~2015년 사이 항공 관련 일자리 8만개가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정용식 국토부 항공정책실장 “항공산업의 입장에서 증편문제를 보고 설명하고 회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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