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애프터 양 | 잎차는 하이퀄리티·가루차는 로퀄리티?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sky6592@mk.co.kr) 2023. 10. 1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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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 가족 댄스 경연대회’라는 게 있다.

TV 앞에 4인 가족이 선다. TV에서 지시하는 동작을 잘 따라 하는 게 핵심이다. 4명 중 1명이라도 동작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삑’ 소리와 함께 TV는 바로 꺼진다. 3회전까지 올라왔는데 이게 웬일. 시작하자마자 ‘삑’ 소리가 들리면서 화면이 암전된다. “아빠가 틀렸어” “엄마가 그런 거야”… 그러다 맨 오른쪽에서 있는 오빠(외모는 삼촌 같은)가 혼자서 계속 같은 동작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양” “양”… 그날 그렇게 양은 작동을 멈추고 모두의 곁을 떠난다. (영화 <애프터 양> 中)

2022년 6월에 개봉한 영화 <애프터 양>은 개인적으로 2022년 최고라고 꼽고 싶은 영화다. 한국계 미국인 영화감독 ‘코고나다’의 세번째 영화. 코코나다는 애플TV가 한국에서 OTT 서비스를 시작하며 야심차게 첫 작품으로 내놓은 <파친코> 연출자로 한국에 널리 알려졌다.

<애프터 양>의 4인 가족은 구성이 독특하다. 백인 아빠‘제이크(콜린 파렐 역)’와 흑인 엄마 ‘카이라(조디 터너 스미스 분)’는 중국인 여자 아이 ‘미카’를 입양한 후 미카의 정체성 형성을 돕고 미카를 돌봐줄 친구 겸 오빠로 중국인 남성 모습을 한 AI 안드로이드를 구입한다. 그 중국인 안드로이드의 이름이 바로 ‘양(저스틴 H. 민 분)’이다.

바쁜 부모 대신 미카를 살뜰하게 살펴주는 양은 미카에게 친오빠 이상의 존재다. 고장난 양을 고쳐서 꼭 자기 옆에 되돌려달라는 미카의 부탁에 제이크는 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다. 그 과정에서 양의 기억 장치를 발견하고 양의 기억을 엿보게 되는데….

그렇게 들여다본 양의 기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양이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도 보인다. 근데 좀 이상하다. 안드로이드가 사랑을 한다고? 그 여인을 사랑하게 된 인연도 기가 막힌다. 이게 뭐지? 양의 지난날이 궁금해진 아빠는 양의 기억 속 여성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만난 복제인간 ‘에이다’.

제이크는 묻는다.

“양이 인간이 되고 싶어 했나요?”

에이다가 대답한다.

“정말 인간다운 질문이군요. 왜 다른 존재가 다 인간을 동경한다고 생각하죠?”

‘기억에 관한 가장 아름답고 독창적인 이야기’라고 극찬받는 영화 <애프터 양>에서 양의 기억을 엿보고 그 기억의 단서를 찾아 나선 백인 아빠는 특이하게도 중국차 가게 주인이다. 서양에서 중국차 가게라는 설정부터가 낯설다.

영화 초입, 한 손님이 들어온다.

“여기 가루차를 파나요?”

“우리는 가루차는 없어요. 잎차만 팝니다.”

“….”

뜬금없이 나오는 잎차와 가루차 얘기를 하기 전에 잠깐 제이크에 대한 소개.

흑인 부인, 입양한 중국인 딸, 안드로이드와 함께 ‘이상한 4인 가족’을 구성해 사는 아빠 제이크는 자신의 가족은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복제인간 부인과 함께 사는 옆집 가족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옆집 가족과 친밀하게 교류하는 카이라도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뿐인가. 양을 끔찍이 생각하는 미카나, 미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양을 사랑하는 카이라와 달리 제이크에게 양은 그저 ‘미카를 돌봐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어쩌면 제이크는 ‘인간만이 인간과 함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라고 생각했던 걸까.

잎 형태 그대로 살려 만든 ‘홀리프’가 최고 등급
부서진 정도대로 브로큰 → 패닝 더스트 → (가루)순 등급
그런 제이크가 양의 기억을 따라가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양의 기억을 엿보며 생각이 많아진 어느 날, 제이크는 가루차를 물에 타서 마셔본다. 평생 쳐다도 보지 않았던 가루차를.

차에 관심 없는 관객이라면 그냥 넘어갔을 이 장면을 ‘차 마니아’로서 ‘오홍홍’ ‘오호홋’ 연신 감탄사를 뿜어대며 몇번을 돌려봤다. 이 영화를 감독했을 뿐 아니라 각본까지 쓴 ‘코고나다’는 어떻게 가루차와 잎차의 비유를 들어 인간과 안드로이드, 복제인간의 얘기를 할 생각을 했을까.

가루차와 잎차가 대체 뭐기에? 가루차를 물에 타거나 잎차를 물에 우리면 똑같이 ‘마시는 차’가 되는 거 아닌가?

완전 ‘NO’ 다.

차나무 잎을 따서 말리고 덖어 만든 찻잎에는 엄연하게 등급이 존재한다. 잎을 일절 손상하지 않고 고이고이 형태를 살려 만든 ‘홀리프(whole leaf)’ 찻잎이 최고 하이퀄리티 찻잎이다. 찻잎을 잘게잘게 짜각짜각 자를수록 등급이 낮아진다. 홀리프 찻잎을 조금 더 잘라서 부서진 찻잎을 ‘브로큰(broken)’이라 하는데 이 ‘브로큰’이 두 번째 등급이다.

조금 더더더 잘라서 더더더 부서진 찻잎은 ‘패닝(fannings)’이라 하고 이게 세 번째 등급이다. 가장 낮은 등급은 가루 형태 찻잎인 ‘더스트(dust)’다. ‘홀리프’와 ‘브로큰’까지는 잎차로 팔리고 ‘패닝’과 ‘더스트’ 등급 찻잎은 보통 티백으로 만들어진다. 가게를 찾아온 손님이 찾았던 가루차는 아마 ‘더스트’였을 테고, 제이크가 판다는 잎차는 분명 ‘홀리프’였을 터다.

(주로 서양홍차에서 이렇게 찻잎 등급을 나눈다. 동양홍차를 비롯해 동양에서 즐겨 마시는 차는 ‘홀리프’ 차가 대부분이다. 서양홍차를 주로 마시는 서양에서는 가루차와 잎차 하면 바로 느낌을 알아챈다. 그러나 가루차와 잎차에 대한 지식은 물론 사전정보조차 별로 없는 동양인은, 영화 속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 모르는 이 장면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흘려보낼 가능성이 높다.)

서양홍차에서 찻잎 등급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용어가 ‘CTC’다. 홍차에서 상당 비율을 차지하는 인도 아쌈차의 경우 차 캔이나 봉지에 ‘아쌈CTC’라고 표기된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CTC’는 ‘Crush(으깨고)’ ‘Tear(찢고)’ ‘Curl(휘마는)’ 가공법으로 만들었다는 의미다. ‘CTC’ 용법으로 가공된 찻잎은 당연히 잘게 으깨져 있다. 고급차가 아님은 물론이다.
품질이 일정하지 않은 찻잎을 한데 섞어 일정한 품질의 찻잎을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된 가공법이다. 아쌈차는 인도에서 생산하는 홍차 중에서도 저렴한 축에 속하는 만큼, 대부분 CTC 용법으로 만든다. 가장 고급 인도 홍차로 꼽히는 다즐링차는 당연히 대부분 ‘홀리프’를 살려 만든다.

이 지점에서 질문. 찻잎을 따서 찻잎 형태를 그대로 살려낸 ‘홀리프’로 만들면 비싸게 팔 수 있을 텐데, 굳이 왜 찻잎을 짜각짜각 잘라 싸게 팔까.

물론 ‘홀리프’ 형태로 팔면 훨씬 이윤이 높아질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이 따거나 기계가 채엽하거나 어느 경우라도 모두를 ‘홀리프’ 형태로 딸 수는 없다. 홀리프를 먼저 골라낸 후 나머지 부서진 찻잎을 모아 낮은 등급 차를 만들 수밖에 없다. 기계로 채엽하면 사람이 딸 때보다 부서진 잎이 많을 터다. 다만 기계 채엽의 경우 사람이 따는 것보다 훨씬 원가가 적게 들어가는 데다 대량으로 잎을 수확할 수 있다. 더 싼 가격에 팔아도 채산성은 충분하다. 게다가 워낙 수요가 많은 홍차는 일일이 수공으로 만들면 그 수요를 다 댈 수 없다.

당연히 오래전부터 기계 채엽이 일반화됐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찻잎 등급이 나뉘었다. 그뿐인가. 차는 농산물인 만큼 재배하는 곳의 환경에 따라 맛과 품질이 180도 달라진다. 대량생산해야 하는 입장에서 여러 지역 차를 한데 모아 일정한 맛과 품질의 차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때 짜각짜각 잘라서 마구 섞어야 훨씬 균질한 맛과 품질을 구현하는 데 유리하다. 와인에 비교하면 ‘홀리프’는 부르고뉴 그랑크뤼 밭 수준, ‘브로큰’은 그냥 밭 수준, ‘패닝’은 마을 수준, ‘더스트’는 지역 수준이라 보면 이해가 쉬울지도.

‘홀리프’ 중에서도 또 등급이 나뉜다. 싹이 나 어린잎으로 만든 차일수록 등급이 높고, 더 자란 찻잎으로 만든 차일수록 등급이 낮다. ‘곡우(4월 20일께)’ 전에 딴 찻잎으로 만든 녹차를 ‘우전’, 곡우 이후에 딴 찻잎으로 만든 녹차를 ‘세작’이라 부르는데 당연히 더 어린잎으로 만든 ‘우전’이 ‘세작’보다 훨씬 찻잎 등급이 높은 고급차이고 가격도 비싸다.

‘SFTGFOP’ ‘FTGFOP’ ‘TGFOP’ ‘GFOP’ ‘FOP’ ‘OP’ ‘P’ ‘PS’ ‘S’….

이것은 암호인가 무엇인가. 홍차 캔(보통 ‘티 캐디’라고 부른다)에 뭔지 종잡을 수조차 없는 이런 암호 같은 용어가 써 있는 경우를 보신 분이 꽤 있을 터다. 이 암호인지 뭔지는 바로 홍차잎의 등급을 가리킨다. 가장 어린 싹인 TIP은 ‘Flowery Orange Pekoe’라 부른다. 그다음 작은 잎은 ‘Orange Pekoe’, 세 번째로 작은 잎은 ‘Pekoe’, 네 번째는 ‘Pekoe Souchong’, 그다음은 ‘Souchong’이다.

‘Crush(으깨고)’ ‘Tear(찢고)’ ‘Curl(휘마는)’ CTC공법
여러 지역 차 섞어 균일한 맛·향·품질 구현하는 데 유리
여기서 퀴즈. 5가지 중 가장 비싸고 등급이 높은 잎은? 당연히 ‘Flowery Orange Pekoe’다.

‘SFTGFOP’는 ‘Special Finest Tippy Golden Flowery Orange Pekoe’의 약자다. ‘Flowery Orange Pekoe’의 약자인 ‘FOP’만 돼도 찻잎 등급이 꽤 높은데, 여기에 별별 수식어가 다 붙었다. 그래서 ‘글자가 길면 길수록 고급 등급’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FTGFOP’는 ‘Special’이 빠진 ‘Finest Tippy Golden Flowery Orange Pekoe’, ‘TGFOP’는 ‘Special’과 ‘Finest’가 빠진 ‘Tippy Golden Flowery Orange Pekoe’의 약자, 이런 식이다. ‘P’는 ‘Pekoe’, ‘PS’는 ‘Pekoe Souchong’, ‘S’는 ‘Souchong’을 의미한다.

여기까지 OK. 그런데 어떤 차를 보니 이번에는 ‘FBOP’라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아니 ‘FOP’는 알겠는데 ‘FBOP’는 또 무엇? 여기서 ‘B’는 ‘Broken’의 ‘B다. ‘FOP’급 찻잎인데 ‘홀리프’가 아니고 살짝 잘린 ‘브로큰’ 등급이라는 의미다. 이 등급 표기와 이름 읽는 법만 알아도 서양홍차 캔에 쓰인 정보를 ‘거의 다 아는’ 셈이다.

영화 속에서 처음 “가루차는 팔지 않는다”고 했던 주인공은 이후 가루차를 직접 마셔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가루차와 잎차는 영화 <애프터 양>에서 중요한 함의를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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