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장군' 소환한 중국 거장, 이래선 안됐다
[김성호 기자]
대만해협의 긴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지난 반세기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기치를 번쩍 들고 대만을 통합하겠다는 야욕을 숨기려 하지 않고 있다. 불과 얼마 전엔 대만을 최단거리로 마주본 다청만에서 역대 최대 규모 군사훈련까지 했다. 대만섬 주변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전투기와 함정 출동기록도 역대최고를 연일 경신하는 중이다.
이를 억제해 온 미국이 서아시아와 동유럽, 북유럽 등지에서 영향력을 잃어왔다는 점, 미국 군수업체가 대만과 계약한 무기를 실제 인도하지 않고 있다는 점, 사실상 전쟁억지 효과를 가진 대만 반도체 공장의 이전을 연거푸 요구해왔다는 점 또한 위기감을 더하는 요소다. 기존의 균형은 무너지고 있고 중국은 기회를 놓치려 들지 않는다.
지난 세기 미국 외교의 상징이며 미중수교를 이뤄낸 일등공신이기도 한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몇 달 전 10년 내 대만과 대만해협에서 3차대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충격적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미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미국이 중국과의 갈등국면을 해소해야 한다는 고언이었으나 상황은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기업인들도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중국에서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는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대만을 장악하려는 중국의 시도가 불가피하다고 보느냐는 물음에 "그것이 그들의 정책"이라며 "그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발언했다.
지난세기 패권을 쥐었던 미국이 힘을 잃어가고 중국은 힘의 공백을 치고 들어간다. 위안화로 에너지를 결제해 세계를 놀라게 하더니 중동의 데탕트 물결에서는 아예 중재자로까지 나섰다. 아프리카에서의 기간시설 설립에 중국이 역할을 해온 건 오래된 이야기다. 우크라이나의 전후복구에도 중국이 큰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이 상당하다. 다가오는 백년, 중국은 더는 지역국가로만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만강홍: 사라진 밀서 포스터 |
ⓒ 팝엔터테인먼트 |
과거의 야성을 잃고 어느덧 중국 국가선전 영화만 찍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장이머우다. 그의 신작 <만강홍: 사라진 밀서>는 오늘날 중국인들의 감성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중국 현지에선 대목인 춘제연휴를 겨냥해 올 1월 개봉했다. 세계적으로는 한물간 감독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중국 내에서는 자국을 대표하는 명감독이다. 그의 작품은 일찌감치 박스오피스 1위를 질주했고, 마침내 한국까지 건너오기에 이른 것이다.
<만강홍>은 송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가 특별한 건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을 뽑을 때 언제나 최상단에 위치하는 영웅이 있는 때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인물도 바로 이 시기에 있다. 말하자면 이순신과 이완용이 함께 하는 시대인 것이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눈치를 챘겠지만 영웅은 악비다. 조정이 남으로 피난하여 비운 자리를 지키며 네 차례나 북벌을 했다. 금나라 수도를 위협할 만큼 진출하여 중원을 회복할 수 있으리란 꿈까지 품었다. 그러나 주화파인 재상 진회와 갈등이 있었고,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다가 옥중에서 살해당한다.
영화는 이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다. 재상 진회는 전장에 나와 군을 시찰하고 있다. 진회를 수행하는 이들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무예의 고수들이다. 진회를 만날 때면 마치 황제를 알현하듯 모든 무기를 내려두고 멀찍이서 말을 전해야 한다. 진회의 업무를 돌보는 이는 대인이라 불리는 이들로, 각자의 영역에서 한 가닥씩 하는 인물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군중에 소란이 인다. 금나라 진영에서 온 사절이 살해당한 채 발견된 것이다. 범인은 진회에게 전해질 밀서까지 훔쳐서 사라졌다. 부총관 손교(잭슨 이 분)는 그날 사절이 묵은 숙소 주변을 호위한 병사를 용의자로 몰아 진회 앞에 이끌고 온다. 끌려온 용의자는 장대(선텅 분)다. 겁 많고 재기 넘치는 말단 병사로 손교의 추천으로 병졸 자격을 얻은 호용병이다. 손교와 장대 사이엔 특별한 관계까지 있는 듯한데, 장대는 저보다 한참 어려보이는 손교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선처를 호소한다.
▲ 만강홍: 사라진 밀서 스틸컷 |
ⓒ 팝엔터테인먼트 |
영화는 진회가 무고를 주장하는 장대에게 사라진 밀서를 찾아오라고 말하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간다. 장대에게 주어진 건 겨우 한 시진(2 시간), 그는 손교와 함께 사라진 밀서의 행방을 추적한다. 사절의 거처에 드나든 기생들과 시간을 알리는 징을 친 병사가 모두 용의선상에 오른다. 죽인 범인보다 사라진 밀서의 행방을 찾는 과정이 진회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충신인 악비를 모함하고 금나라와 내통한 역적이란 평가가 당대 진회에게도 따랐던 것이다. 어쩌면 진회는 적과 내통한 악적이고, 밀서엔 결코 밝혀져선 안 될 배신의 흔적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이머우는 노회한 장인의 솜씨로 900년 전 송나라 적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추리물처럼 영상 위에 풀어낸다. 장대와 손교가 바쁜 걸음으로 성내를 오갈 때면 현대적인 강렬한 사운드의 중국노래가 귀를 때리고, 보는 이를 당혹케 하는 유머까지 곳곳에 배치하여 긴장을 누그러뜨린다. 악비와 진회가 등장하는 무거운 역사물이 보는 이를 압박하지 않게끔 최대한 경쾌하게 발을 놀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다만 단점도 선명하다. 보는 이의 관심을 붙드는 추리도 궁극엔 제 사연을 밝힐 밖에 없다. 주인공인 장대에게 동화되어 이야기를 쫓아온 관객들도 마침내는 감춰진 이야기와 마주하는 때가 오는 것이다. 장대는 끝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제 목숨만 지키는 이로 남을 수 없다. 그건 이 영화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악비와 진회의 이야기에서 어느 누구도 쉽게 진회의 편을 들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그것이 현대 중국이라면, 또 이미 수십 년 동안 중국의 현재에 충성을 다해온 장이머우라면 더욱 그렇다.
영화는 악비와 그를 따르는 이를 위해 만들어졌고, 마침내 본색을 드러낼 밖에 없다. 장대도, 손교도, 영화 속 멋진 이들 모두가 죽은 악비를 위해 진회와 싸우려 든다. 진충보국이란 네 글자가 장대의 등판에서 발견될 때의 감정은 충격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마땅히 관객의 믿음을 뒤집고 놀라게 하는 순간이 자리해야 할 곳에 '에이, 역시' 하는 아쉬움이 들어서고 만다. 이럴 거라면 처음부터 추리가 아닌 다른 방식을 택했어야 할 일이다. 추리는 보는 이의 기대를 이용하여 허를 찌르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 만강홍: 사라진 밀서 스틸컷 |
ⓒ 팝엔터테인먼트 |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영화는 추락을 거듭한다. 짧게 하여도 지루한 이야기를 영화 막판 아주 길고 구구절절하게 늘어놓는다. 죽은 영웅을 위하여 오늘의 생을 바치겠다는 이들의 용기는 장이머우의 화법과 만나 민방위훈련에서나 만날 지루한 정신교육으로 전락한다. 분명한 근거가 없음에도 악비가 썼다고 믿어져온 만강홍, 그 시구절이 모든 병사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광경은 마치 여느 대기업 신입사원 수련회 장면을 보는 것만큼이나 부담스런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실망스러운 것은 악비를 시진핑의 시대에 소환한 제작자와 장이머우의 선택이다. 어느 영화도 중국 정부와 공산당의 의지에서 온전히 독립하여 태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작품이 대작으로 만들어진 현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시대와 호응한다. 지난 시대의 역사 가운데 오늘의 세상과 호응할 이로 선택받는 것이 영웅이다.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쉽지 않은 국면에서 온 국민에게 조국을 위한 헌신과 충성을 무장케 하기 위하여 한국은 이순신을 성웅으로 불러올렸다. 분열된 시대에서 굳건하며 용기 있는 리더십이 필요할 땐 정조 이산에게 주목했다. 언제나 변치 않는 지식인이며 공직자의 자세가 필요하면 정약용을 소환한다. 모든 영웅은 시대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 만강홍: 사라진 밀서 스틸컷 |
ⓒ 팝엔터테인먼트 |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중국이 악비를 소환하고 그에 환호하는 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것은 회귀이며 퇴행이다. 700만도 되지 않는 만주족에게 그 100배에 달하는 한족이 지배 당한 300년이 있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저를 내려놓고 분연히 싸운 악비를 소환하여 제 역사 최고의 영웅으로 만든 건 청나라 시대를 산 한족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중국은 어떠한가. 티베트에서, 신장과 위구르에서, 홍콩에서, 우한과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그들은 다른 목소리를 누르고 하나의 중국을 이야기한다. 어느 때보다 큰 중국이 되어 다름이 아닌 통합을 말한다.
영웅은 언제나 큰 길이 아닌 좁은 길을 택한다. 쉬운 길이 아니라 어려운 길을 택한다. 이익이 되는 길이 아니라 뜻이 있는 길을 택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중국에서 소환해야 하는 영웅은 다른 길이 있다고 목 놓아 외치는 이가 되어야 마땅하다. 민주화와 평화와 다양성과 생명과 환경을 이야기하는 이, 그런 이여야 마땅하다.
수천 년의 역사는 중국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이다. 그 역사가 한국을 포함해 중국문화권을 살아온 수많은 주변국에게 존경받는 요소였다. 그 가운데 인물은 얼마든지 있다. 위기의 순간에서 새로움을 말하고 강자의 폭압에서 약자를 구하는 이, 그런 이가 역사 가운데 있다는 말이다. 악비의 훌륭함이야 백번 말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오늘 역사의 지갑에서 악비를 꺼낸 장이머우와 중국인들의 태도가 너무나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미동맹 성과? 미국 기업만 살판난 걸 대통령님 모르십니까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학교에서 두 통의 메일이 왔다
- "안면 없는 분을 방통위원장으로..." 문 대통령의 당부
- 패한 쪽은 치명타, 양당 강서구청장 선거에 다 걸었다
- 인생 막장에서 시작한 택배... 반년만에 생긴 놀라운 변화
- 시상식 도우미는 왜 항상 여자일까
- 김영환 "검찰 수사중" 답변만... 보다못한 김웅 "같은 당이지만 참 답답"
- 홍익표 "국힘 '김태우 보복판결' 현수막, 사과해야"
- [10분 뉴스정복] 한동훈 앞에 놓인 '론스타' 질문... 승산은 무엇인가
- "윤 대통령, '도발' 언급이 '통일'보다 두 배 이상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