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 없는 분을 방통위원장으로..." 문 대통령의 당부 [문재인의 말과 글]
[최우규 기자]
▲ 2017년 5월 25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하며 직접 차를 따르고 있다. |
ⓒ 연합뉴스 |
제대로 된 선거였다면 대통령 당선 이후 취임까지 70일 정도 여유가 있다. 공직선거법 제34조에 '대통령 임기 만료일 전 70일부터 첫 번째로 돌아오는 수요일에 선거를 시행한다'로 돼 있다. 19대 대선은 탄핵 심판으로 대통령이 파면돼 치러진 보궐선거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된 다음 날인 2017년 5월 10일 취임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를 꾸리지 못했다. 개문발차(開門發車), 딱 그 짝이었다. 문 대통령은 그에 따른 어려움을 토로했다. 1년 가까이나.
2017년 5월 29일 문 대통령은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했다. 장관 후보자 결격 사유가 문제가 되던 때였다. 병역 면탈,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탈세, 논문 표절 등 5대 비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5대 비리를 비롯한 중대 비리 연루자의 고위 공직 임용 배제 원칙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와 깨끗한 공직문화를 위해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이상적인 공약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공약한 것은 그야말로 원칙이고, 실제 적용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기준이 필요합니다. 사안마다 발생 시기와 의도, 구체적인 사정, 비난 가능성이 다 다른데 어떤 경우든 예외 없이 배제한다는 원칙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때그때 적용이 달라지는 고무줄 잣대가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적용 기준을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공약을 구체화하는 인수위원회 과정이 있었다면 그런 점을 감안한 구체적인 인사 기준을 사전에 마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가운데 인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논란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인수위가 있었다면.' 그랬다면 상세한 인사 기준을 마련하고 인사 후보 폭도 넓힐 수 있었다. 검증 강도도 높일 수 있다. 이를 못 한 아쉬움이 발언에 녹아 있다.
보름 뒤인 6월 15일 수석·보좌관 회의 때였다. 그는 "지금 정부는 비상시국에 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한 상황에서 국정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며 "특히 인사 시스템과 인사 검증 매뉴얼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속히 정부를 구성하는 데 온 힘을 모으고 있다"라고 말했다.
6월 27일 첫 국무회의에서 "인수위원회 없이 정부가 출범하고 새로운 내각이 완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국정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협조해 주신 국무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라고 했다. 7월 19일 국정과제 보고대회에서도 "인수위원회 없이 어려운 여건에서 출발했지만 이제 나라다운 나라의 기틀이 잡혀가고 있다는 보고 말씀을 드린다"라고 말했다.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끝날 줄 알았다. 연말인 12월 6일 종교 지도자 간담회에서는 "종교계 지도자 여러분을 청와대에 모시는 게 아주 늦었다. 인수위원회 없이 국정을 시작하다 보니 여러 가지 경황이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해주시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취임 1년이 다 된 2018년 5월 8일 국무회의에서도 "인수위원회도 없이 출범해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모두 노고가 많았다"라고 말했다.
▲ 2017년 5월 22일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위원장(왼쪽 여덟번째)과 홍남기(일곱번째), 김태년(아홉번째) 부위원장을 비롯한 위원회 관계자들이 서울 종로구 금융감독원 연수원에서 열린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출범식에서 현판을 제막하고 있다. |
ⓒ 이희훈 |
"상상도 못 했던 탄핵사태를 뒤로하고 문재인 정부는 그렇게 출발했다. 인수위 기간이 없는 상황을 수도 없이 가정하며 대비했지만, 탄핵받은 정부의 국무위원과 두 달이 넘게 동거하며 초기 국정의 틀을 잡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인수위의 역할과 기능이 그만큼 중요하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네 가지 일을 한다. ①정부의 조직·기능 및 예산 현황 파악 ②새 정부 정책 기조를 설정하기 위한 준비 ③대통령 취임 행사 등 관련 업무 준비 ④대통령 당선인 요청에 따른 국무총리·국무위원 후보자 검증이다. 국정운영 준비의 핵심이다. 새로운 정부가 무엇을 국민께 내세울지, 정부는 어떻게 꾸리고 누구를 쓸지 정하는 일이다. 이때 인수위 성과가 임기 초반 승패를 좌우한다.
'시간 많을 때 뭐하고 인수위 타령이냐'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선거 때는 쥔 모든 카드를 내보인다. 취임 직후 할 일과 1년 이내 할 일, 임기 내 마칠 일, 여러 임기를 거쳐야 할 일을 망라한다. 종합선물 세트처럼. 인수위에서 이들 과제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대통령 당선인은 인수위 일에 몰두한다. 두어 달 뒤를 기점으로 하는 나라의 미래상을 마련한다. 현안은 현직 대통령과 정부가 맡아서 처리한다. 물론 당선인과 상의하지만.
인선의 큰 그림은 미리 그려놓는다. 선거를 치르면서 상황이 달라지기도 한다. 검증 과정에서 인선 틀이 바뀌기도 한다. 인수위 때 이를 정리한다. 인수위를 거쳐 일의 맥락을 아는 사람들이 청와대와 정부, 당에 포진한다. 당·정·청의 모세혈관 역할을 한다. 국민 지지는 높다. 재난급 상황만 발발하지 않으면 초반 국정은 잘 돌아간다.
문재인 대통령은 인수위를 못 열자 대체 방안을 마련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를 꾸렸다. 대통령령을 제정, 5월 22일 자문위를 출범시켰다. 위원장은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다. 7월 15일까지 운영했다.
'그럼, 별문제는 없던 것이 아니냐?' 아니다. 일이 엉켰다. 모든 일이 청와대로 몰렸다. 국정과제를 정하는 일도 실시간 속보처럼 진행됐다. 긴 호흡으로 봐야 할 것은 우선순위에서 뒤처졌다. 문도 못 닫고 출발한 버스라고 한 이유다.
인수위 안에는 함정이 있다. '내부 정치'다. 필연이다. 인수위는 태동한 권력의 틀을 짜는 곳이다. 여권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안팎에 모인다. 당선인과 인수위원장이 일의 가르마를 잘 타야 한다.
안 그랬다가 '내 어젠다가 더 중요하다, 내 사람이 그 자리에 더 낫다'라는 식의 다툼이 벌어진다. 심하면 대통령 임기 중 가장 중요한 첫해를 허비한다. 문재인 정부는 인수위가 없으니, 이마저 없거나 적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홍보 기획비서관으로 임명돼 처음 출근한 날이 5월 17일이다. 일주일 먼저 와 있던 행정관들이 업무를 보고했다. 직전 정부 비서관실 매뉴얼이라고 내민 보고서는 A4용지 두 장짜리. 언론 정책, 국정 홍보, 홍보수석실 업무 조정 등이었다.
보고서에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었다. 가격과 음식사진조차 없는 식당 메뉴판 같았다. 인수위가 있었다면 비서관실 과제가 정리돼 있었을 것이다. 주요 과제의 선후, 대통령 당선인 지시 사항, 여당과 논의 내용 등이다.
문재인 정부 첫해에는 국정 홍보비서관이 없었다. 홍보 기획과 국정 홍보 일을 모두 우리 방에서 했다. 어떤 날은 내게 참석하라고 통보된 회의가 14개였다. 나는 분신술을 못 한다. 몇몇 회의에는 불참 통지하거나 담당 행정관을 보냈다. 이따금 수석이나 비서관이 섭섭해했다. "우리 일은 중요하지 않으냐?" 그건 아니었지만, 선택해야 했다. 무슨 일이 급한지.
우리 방 일도 쌓여갔다. 진도가 잘 안 나갔다. 우선순위를 정했다. 인선이 시급했다. 홍보 기획비서관실은 언론 관련 기관을 담당했다. 가장 주목받는 자리가 방송통신위원장이다. 방송과 통신이라는 두 분야의 정책과 제도를 좌우한다.
방통위원장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공영 방송사 사장을 골라 앉힐 수 있다. 언론의 색깔과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다. 소위 '방송 장악'의 핵심적인 자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총리나 기재부 장관 못지않게 관심을 받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측근 최시중씨를 임기 첫 방통위원장에 앉혔다. 박근혜 대통령도 친박계 인사인 이경재 전 의원을 앉혔다. 방통위원장 임명할 때만 되면 국회에서는 청문회와 청문 보고서 채택을 놓고 난리가 났다.
임기 첫 방통위원장 후보군을 윤영찬 국민소통 수석과 협의했다. 윤 수석이 문 대통령께 보고했다. 한 달여 가타부타 답이 없었다. 2017년 7월 첫 방통위원장 후보가 지명됐다. 이효성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다. 그는 선거 캠프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방송 개혁 문제에 천착해 왔다.
여당에서 문의 전화가 왔다. 항의, 질책이 반쯤 섞여 있었다. "우리 사람이냐?"
야당은 '노무현 정부 시절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출신으로 언론과 방송을 염두에 둔 코드인사'라고 비판했다. 대통령 측근이나 캠프 출신 인사가 지명됐으면 어땠을까. '노골적인 방송 장악 의도'라면서 반발 강도를 높였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때부터 민주당 정부에 뿌리내린 언론과 문화 부문의 원칙이 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다. 누구도 대놓고 '언론을 장악하고 문화 전쟁을 벌이겠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
원칙을 말하기는 쉽다. 실천하기가 힘들다. 안하면 손해 보는 듯할 때 더 그렇다. 문재인 대통령은 밀고 나갔다.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원칙 표명에서 한 발 더 나갔다. '불간섭'을 선언했다.
▲ 2017년 8월 8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악수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개인적으로 안면도 없는 분이고, 그런 분을 방통위원장으로 모신 것은 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방송 독립성을 보장해 주고 그런 가운데 언론의 자유가 회복될 수 있도록 이 위원장이 각별히 노력해주십시오."
이 발언을 쉽게 풀면 이렇다. '나는 이 위원장을 잘 모른다. 그런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 내겐 방송 장악 의도가 없다.' 임명 행위와 덕담을 통해 우회적으로 표시한 게 아니라, 공식 석상에서 명확하게 공표한 셈이다.
오해 여지를 남기지 않는 명확한 의사 표시는 리더의 의무다. 그래야 업무에 혼선이나 차질이 빚어지지 않는다. 잘 안되는 이유? 결심을 굳히지 못했거나, 자신 없을 때, 혹은 책임을 회피하려고 두루뭉수리 말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에서 무너진 게 많은데 가장 심하게, 참담하게 무너진 부분이 특히 공영방송 쪽이 아닐까 싶다. 무너진 공공성, 언론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 정권에서 방송을 정권의 목적에 따라 장악하기 위해 많은 부작용이 있었다. 이제는 방송을 정권이 장악하려는 일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가이드라인이 됐다. 정부와 여당, 담당 공무원, 방송·통신·언론·문화 업계 관계자들에게 말이다. 설마 했는데 '불간섭'을 공표한 데다, 서로 서먹서먹한 인사를 방통위 수장에 앉혔으니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다. 이보다 더 강한 메시지는 없다.
이효성 위원장은 교수 시절 '국민 대표성이 있는 인사가 공영방송 사장으로 뽑혀야 한다'라고 주창해 왔다. 청와대가 낙점하면 방통위가 승인하던 예전 방식에서 벗어났다. KBS 사장 선출 과정에서 시민자문단 의견을 40% 반영했다. MBC에서도 후보자 정책설명회를 인터넷 생중계하고 온라인으로 시민 의견을 받아 최종 면접에 반영했다.
MBC는 최승호 PD가 2017년 12월에, KBS는 양승동 PD가 2018년 4월 각각 사장이 됐다. 두 사장 모두 선거 캠프와 무관했다. 방송 장악이나 간섭은커녕, 의견도 함부로 내지 못했다. 자신들이 보기에 과하다 싶으면 "청와대에서 간섭한다"라고 공개 비판할 이들이었다.
또 다른 시급한 과제가 있었다. 해직자 복직이다. 공정 방송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가 해직된 지 10년 가까이 된 이들이 있었다. 내가 잘 아는 동료 기자도 여럿 있었다. MBC에서 나중에 사장이 된 박성제 기자 같은 이들이다.
여러모로 검토했다. 방통위를 통해 방송사에 빠른 복직을 독려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이는 '불간섭' 원칙을 훼손하는 일이다. 방송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해임 또는 파면을 취소하는 방식이다. 해직자들은 빠른 처리를 원했지만, 절차를 건너뛸 수 없었다. 해직은 잘못된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랬기에 복직 절차는 정당해야 했다.
YTN 해직자들은 노사 협의를 거쳐 2017년 8월 28일 다시 출근했다. 회사에서 쫓겨난 지 9년 만이었다. MBC 해직자 문제도 노사 협의로 5년 만에 해결됐다. 12월 11일 복귀했다.
하나씩 일을 정리해 가자, 안전 운행이 시작됐다. 엔진이 돈 지 반년 정도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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