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의 도시'된 부산, 관객들도 빛났다
[이현파 기자]
▲ 2023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피닉스(Phoenix) |
ⓒ 부산국제록페스티벌 |
지난 10월 7~8일, 부산 사상구 삼락생태공원에서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아래 부산락페)'이 열렸다. 첫째인 7일의 헤드라이너(간판 공연자)를 맡은 밴드는 프랑스 출신의 베테랑 밴드 피닉스(Phoenix)였다. 그래미 어워드를 받은 밴드의 명성에 걸맞게, 피닉스의 공연은 완벽했다. 첫 곡 'Lisztomania'의 신시사이저 사운드가 관객의 마음을 들뜨게 하더니, 이어지는 두 번째 곡 'Entertainment'의 웅장함이 분위기를 장악했다. 특유의 우아한 신스팝을 충실히 구현한 라이브는 물론, 드럼 세션의 가세를 통해 록킹한 에너지를 추가했다.
보컬 토마스 마스는 흔들리지 않는 미성의 보컬로 귀를 즐겁게 했다. 곡의 흐름에 맞춰 정교하게 움직이는 비디오 아트 역시 관객을 열광시켰다. 프랑스 파리 출신이라는 배경을 한껏 살려 루브르 박물관과 베르사유 궁전을 연상시키는 영상이 등장하기도 했고, 조명과 색의 다채로운 활용 역시 공연의 입체성을 높였다. 토마스 마스의 무대매너도 뜨거웠다. 공연 말미에는 관객들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크라우드 서핑(Crowd Surfing)'을 선보였다.
지난해 피닉스가 발표한 앨범 < Alpha Zulu >의 수록곡을 아는 관객은 많지 않아 보였지만, 음악의 숙지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관객들은 열정적인 춤과 슬램, 스캥킹으로 공연에 화답했다. '팬데믹 이후의 관객은 예전만큼 해외 밴드에게 열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9년 전에도 피닉스를 보았지만, 멤버 전원이 50대에 가까워진 현재의 공연이 더 인상적이었다. 세월에 맞서 자신의 호시절을 연장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 2023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피닉스(Phoenix) |
ⓒ 부산국제록페스티벌 |
부산에서 만난 '멋진 아저씨'는 피닉스뿐만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오지상(아저씨) 밴드'라고 소개한 일본 펑크 밴드 10-FEET도 그중 하나다. 이들은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제가 '第ゼロ感(제제로감)'을 두 번이나 부르며 관객을 광란으로 인도했다. '아리랑'을 연주하기도 하고, 한국어 멘트 역시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농구 좋아하세요?', '그래 나는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등 슬램덩크의 한국판 명대사를 외치는가 하면, '부산 아이가', '롯데 자이언츠 최고'라며 부산 주민과의 거리를 좁히기도 했다.
10-FEET가 공연을 펼치는 동시간대, 아시안게임 축구 한일전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행사장에서는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 밴드가 '대-한민국'을 연호하면, 한국 관객이 손뼉을 치는 진풍경도 연출되었다. 한일 양국의 국제적 관계와 별개로, 음악을 매개로 한 교류는 그 어느 때보다 끈끈해 보였다.
국내 밴드의 자존심인 넬은 록적인 선곡으로 무장했다. 히트곡 '기억을 걷는 시간'과 'Stay'를 초반에 몰아서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선곡한 노래 중 90퍼센트를 강력한 음압의 록 넘버로 채웠다. 부슬비 속에서 울려 퍼진 '기생충'과 'Promise Me'는 올드 팬들을 열광시켰다. 지난해 넬이 겪은 음향 사고의 아쉬움을 씻기에 충분했다.
메인 스테이지에서 약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리버 스테이지'에는 데이식스의 영케이, FT 아일랜드 아이돌 출신의 밴드 뮤지션이 여럿 출연했다. FT 아일랜드의 보컬 이홍기는 '17년 동안 짓밟힌 끝에 여기에 왔다'며 아이돌 밴드로서 겪어온 편견을 토로했다. '록'을 지향하는 이들의 인정 투쟁은 성공적이었다. '바래'를 제외하면 '사랑앓이' 등의 옛 히트곡은 하나도 부르지 않았다. 'PRAY' 등 거친 록 넘버를 연주하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변화를 아쉬워하는 사람도 많았겠지만, 그들이 새로 걷는 길도 존중해야 한다.
다음 세대 주자의 시작 단계를 볼 수 있다는 것도 페스티벌의 미덕이다. 최근 EP <이상비행>을 발표한 한로로는 많은 청중의 수에 들떠 하면서도, 당차게 자신의 세계를 드러냈다. 이외에도 스킵잭, 카디, 터치드 등 최근 1~2년 동안 이름을 알린 밴드들이 뜨거운 호응을 이끌었다. 실리카겔과 새소년 역시 여유롭게 차세대 헤드라이너의 자격을 입증했다.
▲ 2023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 |
ⓒ 부산국제록페스티벌 |
페스티벌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아티스트 만큼이나 관객의 역할도 중요하다. 부산 락페에는 다양한 라인업의 아티스트를 편견없이 받아들이는 관객이 존재했다. 거친 하드록 음악을 좋아하는 록 매니아도, 아이돌 밴드를 보러 온 팬덤도 자연스럽게 섞였다. 부쩍 그 수가 늘어난 개성 있는 깃발 부대 역시 빛을 발했다. 한편 부산 락페 측에서도 '관객노래자랑'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판을 제공했다.
수도권에서만 대여섯 개의 록 페스티벌이 열리던 것도 10년 전의 일이다. 그중 수많은 페스티벌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굵직한 해외 뮤지션이 출연하는 대형 락 페스티벌은 이제 부산 락페를 포함해 단 두 개만이 남았다. 수도권에서 열리는 뮤직 페스티벌과 달리, 부산 락페는 영남 방언을 여러 차례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경남, 울산 등 인근 지역에서 찾아온 록팬도 적지 않았다. 지방 특유의 분위기는 여러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부산의 지역 소주인 대선 소주가 스폰서로 참여했고, 돼지국밥이 음식 메뉴에 존재했다. 부산 출신인 세이수미, 소음발광, 경남 창원 출신인 한로로 등 아티스트들도 부산 공연에 대한 반가움을 드러냈다.
지난해 부산 락페는 운영 미숙으로 많은 관객들에게 비난받았던 바 있다. 올해 개최 직전까지도 많은 의문 부호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절치부심한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부지를 넓히면서 쾌적한 환경을 조성했고, 스태프 역시 친절하게 동선을 안내했다. 아시아의 다양한 음악 신(scene)과 아티스트를 소개했으며, 신예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파리지앵과 <슬램덩크>, 아이돌이 '록'이라는 이름 아래 공존했다. 직접 목도한 부산은 영화의 도시이자, 록의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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