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함을 넘어선 '리즈시절' 배두나의 풋풋한 멜로

양형석 2023. 10. 1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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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배두나-김남진 주연의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양형석 기자]

지난 2016년 영국방송공사 BBC에서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영화' 30위 올라 있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는 박찬욱 감독과 인연 및 친분이 있는 배우와 영화인들이 크고 작은 역할로 특별 출연했다. 오프닝 장면 건물 옥상에서 자살하는 남자 역의 오광록과 오대수(최민식 분)가 횟집 앞에서 멍하니 수족관을 보고 있을 때 오대수에게 많은 돈이 들어 있는 지갑을 건네는 노숙자 역의 이대연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영화 초반 오대수가 15년 동안 먹었던 군만두를 통해 감금방의 위치를 알아내는 장면에서는 감금방에 군만두를 배달하는 중국집 직원이 등장했다.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들으며 한심하다는 듯 오대수를 쳐다 보는 배달청년은 "주방에 얘기해라, 군만두에 부추 좀 적당히 넣으라고"라는 오대수의 건의사항에 시크한 표정으로 "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익숙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7층과 8층을 동시에 눌러 감금방이 있는 7.5층으로 군만두를 배달한다.

군만두를 배달해야 한다는 중요한 임무 때문에 비밀의 감금방 위치를 알게 된 배달청년을 연기한 배우(?)는 CF 및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박찬욱 감독과 친분이 있었던 용이 감독이었다. 그리고 <올드보이>가 개봉하기 한 달 전이었던 2003년10월, 용이 감독이 만든 장편 데뷔작이 관객들에게 먼저 선을 보였다. '로맨틱 추리 연애담'을 표방했던 배두나와 김남진 주연의 멜로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였다.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는 전국 4만 관객으로 흥행에서는 전혀 재미를 보지 못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 (주)튜브엔터테인먼트
 
해외 거장 감독들에게 인정 받은 배우

1998년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잡지모델로 데뷔한 배두나는 드라마 <학교>에서 반항적인 아웃사이더를 연기하며 주목 받았고 공포영화 <링>의 한국판을 통해 스크린에 데뷔했다. 2000년에는 거장 봉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는 박현남을 연기했고 고 곽지균 감독의 <청춘>,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들 부탁해> 등으로 필모그라피를 쌓다가 2002년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에 출연했다.

연기자로 데뷔한 지 4년 만에 훗날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양대 거장'이 된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모두 출연한 배두나는 2003년 강동원의 연기 데뷔작 <위풍당당 그녀>로 단독주연을 맡았다. 그리고 배두나는 같은 해 10월 용이 감독의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에서 곰처럼 눈치 없고 무던하지만 사랑스러운 캐릭터 현채를 연기했다. 비록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영화 속에서 배두나의 매력은 단연 돋보였다.

2005년 일본영화 <린다린다린다>에 출연한 배두나는 2006년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통해 '천만 배우'에 등극했다. 2009년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인형>에 출연하며 활동범위를 더욱 넓혔다. 2012년 탁구영화 <코리아>에서 북한의 에이스 리분희를 연기한 배두나는 같은 해 워쇼스키 남매의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1인 다역에 도전하면서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2015년 워쇼스키 자매의 <주피터 어센딩>과 넥플릭스 드라마 < Sense8 >에 출연한 배두나는 2017년 tvN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조승우와 호흡을 맞췄다. <비밀의 숲>은 시즌2까지 제작됐고 해외활동에 집중하던 배두나는 <비밀의 숲> 시리즈를 통해 오랜만에 국내 시청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2019년과 2020년에는 두 시즌에 걸쳐 방송됐던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 역병을 진압하는 데 힘 쓰는 의녀 서비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배두나는 지난 2019년 미국의 패션잡지 보그에서 스칼렛 요한슨, 디피카 파두콘과 함께 표지모델로 등장했다. 보그의 130년 역사에서 한국인이 표지모델이 된 것은 배두나가 처음이었다. 2021년 넷플릭스 드라마 <고요의 바다>에서 동물행동학자 송지안을 연기한 배두나는 작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한 <브로커>에 출연했고 올해는 <도희야>를 연출했던 정주리 감독의 신작 <다음 소희>에서 냉철하고 소신 있는 형사 오유진을 연기했다.

사랑의 메모를 남긴 빈센트 찾기 프로젝트
 
 현채(왼쪽)와 동하가 집 앞 계단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풋풋하고 예쁜 장면이다.
ⓒ (주)튜브엔터테인먼트
 
<왕의 남자>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고 <라디오 스타>,<사도>,<동주>,<박열>,<자산어보> 등 좋은 영화를 많이 만들었던 이준익 감독은 1993년 장편 데뷔작 <키드캅>이 흥행에 실패한 후 10년의 공백을 가졌다. 이처럼 거대자본이 들어가는 상업영화에서는 흥행여부에 따라 제작사와 감독의 미래가 결정되기도 한다. 용이 감독 역시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가 현재까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장편영화가 되고 말았다.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서 사랑의 메모를 발견한 할인매장(지금은 국내에서 철수한 프랑스의 할인매장) 직원 현채가 메모를 쓴 미지의 인물 빈센트를 추적하는 내용이다. 곰 같은 현채는 빈약한 근거를 앞세워 소개팅남(엄태웅 분)과 직장상사 윤팀장(김홍표 분), 현채가 책을 빌리는 도서관의 사서 지석(윤종신 분) 등을 빈센트라고 확신하지만 현채의 어설픈 추리는 번번이 빗나간다.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는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2020년대의 감성으로 보기엔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도서관 책에 쓰여진 메모를 통해 사랑을 찾으려 애쓰는 현채의 고군분투(?)는 배두나의 사랑스러운 연기와 만나 뜻밖의 매력을 전달한다. 세련된 완성도의 요즘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풋풋한 2000년대 멜로영화가 가진 감성이다(물론 현채의 추리와 달리 메모의 주인은 완전히 엉뚱한 인물이었다).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는 여주인공 현채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영화지만 남자주인공 동하(김남진 분)의 시선과 감정으로 영화를 감상하면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현채를 짝사랑하던 동하는 군복무를 마치자마자 무작정 현채가 있는 서울로 상경했고 현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빈센트를 자처하기도 했다. 비록 자신이 빈센트라고 속인 것은 금방 들킬 거짓말이었지만 현채를 향한 동하의 마음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가수 윤종신이 담당한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OST도 뜻밖의 명반이다. 2002년 장항준 감독의 <라이터를 켜라> OST를 맡았던 윤종신은 전공분야인 멜로영화 OST를 담당하며 자신의 정규앨범에 버금가는 정성을 쏟았다. 실제로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OST에는 윤종신과 유희열, 김연우, 롤러코스터의 조원선, <아껴둔 사랑을 위해>를 불렀던 이주원, 이승환의 <세 가지 소원>을 만든 이규호 등 현역 가수들이 대거 참여했다.

짧고 굵게 활동했던 모델출신 배우
 
 동하는 빈센트에 빠져 있는 현채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이 빈센트라고 속였다.
ⓒ (주)튜브엔터테인먼트
 
모델 출신 배우 김남진은 2010년대 들어 연예계 생활을 접었지만 전성기 시절이던 2000년대 초·중반에는 1년에 3~4작품에 출연했을 정도로 바쁘게 활동하던 배우 중 한 명이었다. 그와 함께 청바지 모델로 활동했던 배우들은 현재까지도 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송승헌과 소지섭, 김하늘 등이다. 김남진은 K2의 <그녀의 연인에게>,왁스의 <부탁해요>, SG워너비의 < Timeless > 등 드라마 타이즈의 뮤직비디오에 많이 출연한 배우로도 유명했다.

<여고괴담>으로 데뷔해 <청춘>,<예의 없는 것들>,<군도: 민란의 시대>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배우 윤지혜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에서 현채의 할인마트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 미란을 연기했다. 미란은 현채의 '빈센트 찾기 작전'에 도움을 주는 좋은 친구지만 훤칠한 외모의 동하를 보고 첫 눈에 반해 현채에게 동하를 소개해 달라고 보챈다. 미란은 동하가 빈센트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현채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영화의 OST를 담당했던 윤종신은 현채가 책을 빌리는 도서관의 사서 양지석 역으로 출연했다. 지석이 빈센트라고 오해한 현채가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라는 메모를 건네자 "'봄날의 곰' 뿐이겠어요?"라는 답장을 건네며 현채와 데이트를 한다.

지석은 지독한 동물 마니아로 곰은 물론이고 개미핥기 등 각종 동물에게 큰 관심을 보인다. 만약 지석이 고래에도 관심이 있었다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와 말이 굉장히 잘 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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