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코스모스 향기를 담아…

2023. 10. 11.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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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성큼 일상 속으로 다가왔습니다. 코스모스 꽃길이 다시 그리워집니다. 조정문에 코스모스 향기를 담아 보내면 당사자의 상처받은 마음이 곱게 치유될 수 있을까요? 조정문 초안을 보내주시면 제가 이른 아침의 코스모스 향기를 담아 당사자에게 보내겠습니다."

분노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은은한 가을꽃 향기를 전할 수 있는 마음의 여분 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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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현 변호사


“가을이 성큼 일상 속으로 다가왔습니다. 코스모스 꽃길이 다시 그리워집니다. 조정문에 코스모스 향기를 담아 보내면 당사자의 상처받은 마음이 곱게 치유될 수 있을까요? 조정문 초안을 보내주시면 제가 이른 아침의 코스모스 향기를 담아 당사자에게 보내겠습니다.”

주로 이메일로 업무 소통을 하는 우리 법원 사무관님은 가끔 이렇게 시적인 문구를 보내준다. 오늘 아침 열어본 이메일에서 문득 가을 코스모스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올여름은 유난히 덥고 길었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묻지 마 칼부림’ 사건이나 악성 민원, 생활고 등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고 같은 비극적인 일들이 연달아 발생해 마음을 참담하게 했다.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생긴 상처들이 우리가 미처 돌아보지 못한 사이에 고드름처럼 자라 곪아 터져 발생한 일들이리라.

요즘같이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법원에서도 조정이나 합의가 잘 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심리도 위축되고 예민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나도 조정실을 찾아오는 분들에게 코스모스와 같은 향기를 전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조정위원으로서 예절과 품격 있는 태도를 지키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상처를 없앨 수야 없겠지만 최소한 그 상처에 대고 소금을 뿌리는 일은 하지 말자, 그 상처가 자라나 곪아 터지지는 않게 해보자고 마음먹는다.

사실 매번 웃는 낯으로 민원인들을 대하기는 어렵다. 내가 제시한 조정안에 “위원님이라면 그 금액을 받아들이겠냐?”고 따지는 경우도 있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상대방과 언성을 높이며 싸울 때도 있다. 붉어지는 얼굴을 숨길 수 있도록 차라리 다시 마스크를 쓰고 싶은 심정이다. 이럴 때는 입장을 바꿔 초년 변호사 시절 재판이나 조정에 참석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십여년 전 이야기지만 자신이 보내는 강제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하는 쪽에 불이익한 판결을 쓸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 판사도 있었고,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면서도 본인 의견을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끌어주던 판사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 아직까지도 마음에 앙금이 남아 있는 반면 후자의 경우 멀게만 느껴지던 사람에게 실로 소탈하고도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져 그 결정이나 판결에 더 마음으로 승복하게 됐던 것 같다.

미래에는 판사나 변호사의 업무도 인공지능(AI)이 대체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과연 AI가 이런 재판 당사자들의 감정까지 다룰 수 있을지 의문이다. 소송기록에 적혀 있는 내용과 똑같다고 당사자의 말을 가로막거나, 법률 검토를 열심히 했더라도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한쪽 편만 든다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법을 설명하면 법이 왜 그러냐고 항의하고, 내가 제시한 논리에는 수많은 반박 논리가 돌아오기 마련이다. 끝까지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직업군이 되려면 결국 사람의 감정과 마음을 잘 다룰 수 있는 소통 전문가가 돼야 할 것 같다.

고 박완서 작가는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에세이집에서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가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 옳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고 했다. 공감과 연민이 필요한 시절이다. 오늘 점심시간에는 잠시 법전을 내려놓고 근처 공원이라도 걸어 봐야겠다. 분노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은은한 가을꽃 향기를 전할 수 있는 마음의 여분 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안지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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