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중심주의 넘어 새롭게 담아낸 한국적 담론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서울역사박물관에 난데없이 현대미술 영상작품이 들어왔다.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전시장 중 하나로 이곳이 사용돼 기획전시실에서 재미교포 미술가 제시천의 개인전 장소로 열리고 있다.
지난달 10일 찾은 이곳에서 세계 무형문화유산을 관장하는 파리 유네스코 본부를 찍은 이미지 위로 생뚱맞게 한국 할머니가 ‘오∼’라며 중얼거리듯 노래하는 음악이 입혀진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오 더스트’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유럽 중심적인 언어 위계와 문화 패권에 도전한다. 또 다른 공간에서는 미국 내 아시아 여성을 향한 증오 범죄 증가와 그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여성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을 어린 시절 본 한국의 강강수월래와 연결시킨 영상 작품 ‘술래’를 볼 수 있다.
2년마다 열리는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올해 네덜란드 큐레이터 출신 레이첼 레이크스가 총감독으로 선정됐다. 올해 주제인 ‘이것 역시 지도’는 초국가적 태도, 문화적 혼종을 기치로 내건다. 서울 역사박물관의 제시천 작품은 바로 이 주제를 정확하게 건드린다.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목적으로 설립된 서울역사박물관은 이번에 비엔날레 장소로 쓰임으로써 서울의 역사를 국가 경계 밖으로 확장하는 효과를 냈다.
그런데 올해 비엔날레 주제가 지향하는 서구중심주의 인식론에 대한 반기는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이래 국제적인 미술행사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돼 왔다는 점에서 ‘이것 역시 새로울 것 없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부산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제주비엔날레 등 지역 비엔날레 들이 ‘지역 정치’에 갇혀 기후 위기, 탈식민주의 등 글로벌 담론과 지역적인 주제까지 섞어버리는 ‘비빔밥’형이 되는 것과 달리 이번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탈서구중심주의 지도’라는 하나의 방향성을 끝까지 밀어갔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다.
메인 행사 장소인 서소문본관 1층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지도 그리기를 보여준다. 배가 바다 위를 빙빙 돌며 선을 그리는 ‘섬 그리기 영상작품’(정소영), 천에 인쇄하는 방식의 ‘방콕의 기회주의 생태학 지도’(아니말리 도메스티치) 등이 나왔다. 가장 스펙터클한 것은 카펫처럼 바닥에 놓인 놀란 오스왈드 데니스의 ‘아토피아 필드’이다. 다이아그램 형식의 지도에 쓰인 ‘세상의 끝’ ‘옛 장소를 위한’ ‘새로운 독립성’ 등의 문장은 흑인의 관점에서 구축한 가상의 영토를 상상하게 만든다.
2층에서는 지도에 나타나는 이미지의 재현과 실제 간의 간극을 살펴보면서 인간의 주관적인 소통방식에 뿌리를 둔 새로운 지도 만들기를 제안한다. 안나 마리아 바이올리노의 ‘단서 연작’은 종이에 검은 실로 선이나 곡선을 바느질했다. 실의 굴곡은 능선이나 계곡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196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 브라질로 이주한 뒤 독재 정권하에서 살며 검열의 시대를 살아 온 작가의 심리적 지도로도 읽힌다. 크리스틴 하워드 산도발은 난지창작스튜디오에 체류하면서 난지도 흙을 점토와 섞어 식민주의 건축의 상징인 아치형 이미지를 만든 두 폭 회화를 내놓았다.
3층에서는 디아스포라적 삶 자체에 주제를 집중한다. 옷이 조각보처럼 붙여져 있는 대형 퀼트 작품이 눈길을 끄는데, 이 작품은 작가 메르세데스 아스필리쿠에타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한인 커뮤니티에서 가져온 옷, 암스테르담에서 사온 중고 옷, 작가의 작업실에 모은 면 등을 재료로 사용했다. 여성 속옷 등이 지도의 땅 덩어리처럼 꿰매져 있는 느낌을 준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작가 이케조에 아키라는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초현실적 환경을 수채화 같은 느낌의 유화 드로잉으로 표현해 흥미롭다.
올해는 서소문 본관에서만 치러졌던 역대 행사와 달리 서울역사박물관을 비롯한 5개 외부 전시장을 활용한 점이 두드러진다. 전시 장소가 확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여 작가 수는 지난해와 비슷한 40명(팀)으로 한정해 감상의 몰입도를 높였다. 주제의 신선도는 떨어지는 대신에 전시의 디스플레이 자체는 아주 세련됐다. 지난 광주비엔날레도 그랬지만 점점 비엔날레가 새로운 이슈 제기는 없는 대신 전시의 세련미로 승부수를 거는 느낌이다.
2년마다 열리는 비엔날레와 달리 독일의 뮌스터조각프로젝트는 10년마다 열린다. 2017년 5번째 행사 때 5년마다 하자는 논의가 거셌다. 하지만 당시 행사를 기획한 큐레이터 브리타 페터스는 “5년 간격은 너무 짧다. 10년은 지나야 세상이 뭔가가 드라마틱하게 변하고, 미술계에도 새 아이디어를 가진 세대가 등장하지 않냐”고 반문했다.
2년마다 열리기 때문에 새로운 주제를 찾기가 힘들다면 질문의 방향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작품의 내용을 보여주는 주제가 아니라 작가란 무엇인가, 미술관이라는 무엇인가 등 미술을 둘러싼 제도를 건드려보는 것도 탈출구가 될 수 있다. 11월 19일까지.
글·사진=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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