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도 진화한다…올해만 여성 4명 수상, 금가는 유리천장
"왜 여자가 이기는가." 클로디아 골딘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지난 9일 발표한 소논문이다. 여성이 남녀차별을 딛고 두각을 드러낸 155개의 역사적 순간을 짚어냈다. 이 논문을 발표한 지 몇 시간 후, 그는 156번째 역사적 순간의 주인공이 됐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됐다"는 전화를 받으면서다.
올해 노벨상을 받은 여성은 모두 4명이다. 노벨상은 평화ㆍ문학ㆍ생리의학ㆍ화학ㆍ물리학 및 노벨 사후 지정된 경제학까지 포함해 6개 분야다. 이중 여성 수상자가 4명 나온 것은 노벨상의 유리천장도 깨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올해 여성 수상자들은 골딘 교수(경제학상), 나르게스 모하마디(평화상), 커털린 커리코(생리의학상, 공동 수상), 안 륄리에(물리학상, 공동 수상)이다. 륄리에 스웨덴 룬드대 원자물리학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노벨상을 받은 여성이 많지 않기에 특별한 순간"이라며 "모든 여성에게 열정만 있으면 과학에 도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수상자 숫자뿐 아니라 수상 내용에서도 평등을 향한 진전이 감지된다. 모하마디 평화상 수상자는 이란 여성의 인권을 위해 헌신해왔다는 공로로 선정됐고, 골딘 교수는 남녀 고용 불평등 연구 공로로 경제학상을 받았다. 여성을 위한 이슈에 노벨상이 본격 관심을 기울인다는 신호탄이다. 최고 권위의 상인 노벨상이 여성 이슈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여성 학자 및 운동가들뿐 아니라 여성 이슈 해결을 위한 인류 전체의 노력에도 박차를 가할 호재다.
"노동에서 여성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중요하다"(야코브 스벤손 노벨경제학상 선정위원장)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우는 여성이기에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베리트 라이스 안데르센 노벨위원회 위원장) 등의 노벨상 측 언급도 잇따랐다.
이 맥락에서 특히 경제학상을 수상한 골딘 교수의 연구 성과는 주목된다. 그는 200년 동안의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해 남녀 고용 불평등과 임금 차별을 분석해냈다. 워싱턴포스트(WP) 9일자에 따르면 골딘 교수가 스스로를 부르는 별명은 '탐정'이라고 한다. 수많은 자료 속에 파묻힌 단서를 찾아 나가는 연구 방식을 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구의 목적은 노동시장에서의 젠더 평등이다.
골딘 교수는 수상자 발표 후 기자회견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경제학에 더 관심이 많다는 오해가 있지만, 경제학은 사람에 관한 것이자 불평등을 연구하고 여성 노동력을 다루며 경제 발전을 이뤄가자는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골딘 교수는 노벨 경제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한 최초 여성이기도 하다. 하버드대 경제학부의 여성 최초 종신교수로 임명됐다.
이번 기자회견에서 그는 특히 한국의 저출산 문제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관련 질문을 받고 "한국의 출산율은 0.86"이라고 정확히 언급하며 "한국을 빠른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남성과 한국 기업문화는 세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기자회견을 하는 그의 곁엔 반려견을 데리고 온 남편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간 노벨상은 백인 남성 등 사회 주류에 편향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평화상과 문학상을 제외한 순수과학 분야에서 여성 수상자의 비율은 5%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여성 작가인 아니 에르노는 "노벨상은 남성을 위한 것"이라고 수상 소감에서 지적하기도 했다.
여성 및 특정 인종에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돼왔다. 그러나 스웨덴 왕립과학원 측은 2021년 "성별 및 인종 할당제는 검토하지 않는다"며 "대신 수상자 후보 선정 위원회의 여성 비율을 늘리겠다"고 밝힌 바 있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지난 2~9일에 걸쳐 발표됐으며, 시상식은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10일 스웨덴 각지에서 열린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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