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장애인] 해님 별님

2023. 10. 1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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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밀알복지재단과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공동 주최한 제9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일상 속의 장애인’에서 입상한 작품입니다. 국민일보 ‘더 미션’은 입상 작품 전체를 매주 소개합니다.>

해님 별님
유리

일상부문 최우수상
(에이블뉴스 대표상)

으깬 삶은 달걀이 담긴 우유 한 잔.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동생을 위해 어린 시절 엄마가 식사 대용으로 만들어 주던 특별한 식사는 아직도 기억 저편에 가슴 아린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어디에서도 먹을 수 없는 따뜻한 음식들은 꽤나 고소했고 달콤했다. 나의 세 살 터울 남동생은 아픔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 시절, 서울 신촌에 위치한 연세대학병원은 제2의 우리집이었다. 담당 의사는 말했다. “오래 살지 못할 겁니다.”

엄마의 나이, 고작 스물일곱이었다. 위암 3기의 아버지를 여의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막냇동생을 포함한 세 명의 동생과 그녀 나이 열여섯에 마음을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는 엄마를 둔 나의 엄마는 고생 끝에 지옥으로 떨어져 버렸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으리라. 의사는 앞으로 20년간 매년 혹은 그 이상의 수술을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20년. 엄마는 그때 ‘20년만 더 살아보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린 나를 품에 안고 한없이 하늘만 쳐다보았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나의 엄마는 핏덩이인 동생을 끌어안고 혼신의 힘을 다해 살려냈다. 엄마는 사람들 틈에 보이지 않게 꼭꼭 숨어있었다. 잘 웃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이라 생각했다. 아픈 아이를 낳은 죄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불쌍한 나의 어머니를 위해 신이 나를 태어나게 했다고 생각했다. 가여운 나의 어머니를 위해 세상의 빛이 되라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되뇌었다. 병원비는 수백에서 수천만 원에 달했고 수술은 마치 실험에 가까웠다. 사는 것이 힘들고 괴로웠으니 부모님의 다툼도 잦았다. 아빠는 아침에 가까운 새벽, 늘 술에 취해 들어왔고 내가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 나와 동생의 입학식이나 졸업식, 각종 행사나 생일날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었다.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외박이 잦았다. 아빠는 소리를 질렀고 물건을 던졌다.
“죽자, 다 같이 죽어버리자. 더 살아서 뭐 하겠어.”

나는 매일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나운 악마로 변해버린 아빠 앞에서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울부짖었다. 혹여나 엄마가 다칠까 작은 몸으로 엄마를 끌어안고 죽음의 시간을 버텨냈다.
“동생이 죽으면 엄마도 죽을 거야.”

동공의 초점이 사라진, 차갑게 굳어버린 엄마는 슬픔을 초월한 모습이었다. 나는 모두가 잠든 새벽, 엄마와 동생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고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잠들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혔고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다. 눈을 감고 손을 뻗으면 죽음이 달려와 내게 닿을 것 같았다.

“어서 와, 이제 가자.”
죽음이 뜨겁게 끌어안는다. 이 모든 것이 힘에 겨워 일곱 살 어린 꼬마는 아프지 않게 죽게 해달라고, 내일은 눈을 뜨지 않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그러나 죽음은 그림자만 드리울 뿐 스쳐 지나가곤 했다.

항상 슬픔에 휩싸였던 것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붕어빵과 어묵을 실컷 먹고 낮잠을 자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이었다. 목욕탕 특유의 오이 비누 냄새를 맡고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가 작은 어린 동생과 물장구치는 것은 재미있었다.

또 다른 기쁨은 엄마의 노래 소리였다. 엄마는 줄곧 우리 남매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우리가 원하는 만큼 동요를 불러주었고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 놓인 자그마한 편지였다. 귀여운 아기 토끼와 사슴을 손수 그린 손편지를 자주 써주셨는데 지금 읽어도 참으로 감동적이다.

“해님처럼 밝은 딸아. 동생은 별님이란다. 마지막 노력의 대가는 해님처럼 반짝일 거란다. 동생 또한 어렸을 때는 힘들었지만 우리 가족 모두가 힘을 합해서 동생을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님처럼 어두운 곳을 비추면 반짝 반짝한 사람이 될 거라 믿는다. 우리 가족 모두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바란다. 즐거움, 슬픔. 모두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거란다. 슬픔. 슬픔은 싫지만 슬픈 이야기와 노래는 가슴을 적셔주지. 슬픈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과 즐거움으로 살았으면 싶다. 너의 생일 축하해.”

엄마는 어릴 적부터 우리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 주셨고 무한한 긍정의 에너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부모님이 24시간 식당을 10년간 운영하면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이 없었지만 엄마의 소중한 가르침이 있었기에 우리 남매는 사춘기에 흔들리는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삶의 고달픈 파도는 다시 거침없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하루 서너 시간의 잠도 청하지 못한 채 희생으로 살아온 부모님은 부진한 식당 매출과 건물 주인의 횡포로 강제폐업을 하게 되었다. 이후 아빠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안면신경마비가 생겼다. 1년 이상, 눈이 감기지 않을 정도로 마비 증세가 심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어두운 터널은 동생이 스무 살이 되는 해에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우리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더욱 어려워져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외할머니의 반지하 방으로 거처를 옮겼고 두 개의 방에서 다섯 명 성인이 살게 되었다. 엄마와 내가 큰방을 쓰고, 작은방은 아픈 할머니가, 아빠와 동생은 주방과 통로 사이 공간에 요와 이불을 깔고 잠을 잤다. ‘왜 우리 가족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걸까.’ 하늘을 원망했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나에게 가난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내 나이, 더없이 예쁠 스물다섯이었다. 우리 가족은 지하 구덩이 속에서 기어 나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이른 새벽 출근해 밤낮 할 것 없이 생존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주말 저녁엔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에 밥그릇을 비벼가며 서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낯선 희망이 찾아왔다. 동생이 지원할 수 있는 장애인 전형 공고문을 찾은 것이다. 나는 동생에게 은행의 인턴 직무를 권유했고 동생은 도전했다.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던 동생은 나와 함께 자기소개와 면접을 틈나는 대로 준비했고 감사하게도 합격했다. 동생의 합격 소식에 아빠는 굳어진 얼굴을 찡그리며 눈물을 흘렸다. 부모님은 동생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몸 건강히 한글만 뗄 수 있으면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평범한 사회생활은 꿈꾸지 못했고 부모님 스스로 평생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여기며 살아오셨다. 그런 동생이 양복을 입고 출근을 했으니, 부모님은 밥을 먹지 않아도 행복하다 하셨고 월급을 받지 않아도 감사하다고 하셨다. 그렇게 용기를 얻은 동생은 1년간의 인턴 기간이 끝나고 다른 직장에 인턴을 지원했고 2년간 정직원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대부분 인턴이 그렇듯 기회는 오지 않았다. 동생은 마지막 날까지 성실하게 출근했고 직장 동료와 상사 분께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렇게 1년 이상의 짧고도 긴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부모님은 기도했다. 동생이 평생직장을 얻을 수 있다면 남은 생을 선한 일을 하며 살겠노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동생 또한 열심히 자기소개서와 지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수없는 낙방에 실망과 슬픔이 오고 갔다. 코로나19로 일반직 채용도 사라지는 시기에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동생은 기다림 끝에 2021년, 역무원으로 최종 채용되었다. 그토록 바라던 평생직장이었다. 우리는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엄마가 말했다.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

낯선 희망의 떡잎은 쑥쑥 자라 튼튼한 줄기를 만들었다. 동생은 착한 배필과 오랜 시간 교제 끝에 단란한 가정을 꾸렸고 나 또한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네 명이던 우리는 여섯 명이 되었고 부모님은 은퇴해 자유의 삶과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어릴 적 엄마의 편지처럼 에너지 넘치는 예술가가 되었고 일반 학생들 뿐 아니라 동생과 같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연극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해님이 되었고 동생은 별님이 되어 사람들에게 반짝반짝한 빛을 선물하고 있다.


오늘도 우리는 살아간다. 때론 고달프고 때론 괴롭기도 했지만 생이 주는 감동을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살아갈 것이다. 어둠 속에도 희망이 있음을, 삶이 간절한 이들에게 우리의 씨앗이 전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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