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서점인 줄 알았는데 신문사였다

이안수 2023. 10. 10. 13:3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멕시코에서 만난 '푸른 정신'... '길모퉁이 서점' 주인 프란시스코 마르티네즈 에르난데스

멕시코 여행 중에 여러 문화예술 현장을 찾아가고 있다. 지난 10월 5일, 멕시코시티 틀라텔롤코의 작은 길거리 서점을 찾았다. <기자말>

[이안수 기자]

내게 멕시코를 상징하는 여러 이미지 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것은 챙이 넓은 모자 '솜브레로(Sombrero)'이다. 멕시코의 전통의상을 모두 갖추어 입지 않았더라도 솜브레로 쓴 모습만으로 멕시코의 멋이 물씬 느껴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멕시코에서 솜브레로를 쓴 사람을 보기는 어려웠다.

돌이켜 보니 그 기대는 착각이었다. 갓 쓴 한국인의 모습을 기대하고 한국에 온 외국인의 착오와 다를 바 없던 것이다. 솜브레로를 쓴 사람에게는 마초이즘적인 분위기가 함께 따라붙곤 했었는데 멕시코 독립기념일의 소칼로 광장 열병식에서 기마여성이 전통의상과 함께 쓴 솜브레로는 여성에게 시크함을 도드라지게 했다.

길거리에서 작은 서점부스를 운영하는 어르신과 얘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자 '잠시만요!'를 요청하고 책더미 뒤에서 솜브레로를 꺼내들었다.
  
▲ 솜브레로를 쓴 서점주인. 서점주인 프란시스코 마르티네즈 에르난데스의 얼굴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를 묻자, '잠깐만'을 요청한 뒤 꺼내 쓴, 챙이 넓은 멕시코의 전통모자 '솜브레로'. 이것은 이분에게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돋보이게 하는 의상이 아니라 '멕시코의 정체성'이었다. 그가 자유를 사수하기 위해 쓰는 글처럼 여전히 지켜내야 할 '푸른 정신'.
ⓒ 이안수
 
틀라텔롤코 사거리 길목의 플로레스 마곤 버스정류장 앞, 큰 나무 아래 작은 부스서점에서 한 노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타야 할 버스 몇 대를 보내는 시간 동안 지켜보았지만 책 구입을 하는 손님은커녕 문의하는 손님조차 없었다. 이 목 좋은 장소에서 잡화나 간식거리를 팔았다면 이미 여러 사람의 손님들로부터 현금을 손에 쥘 수 있었을 것이다.

100여 권 책과 함께 조용하게 소일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소음 가득한 이 번다한 거리보다 훨씬 좋은 장소가 있을 것이다. 그가 이런 당연함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 순간 그가 '어리석은 척하고 있는 성인'처럼 보였다. 바늘 없는 낚시를 드리운 위수 강변의 강태공을 만났는데 말 한 마디 붙여보지 않고 지나치는 어리석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이 서점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길모퉁이 지식(La esquina del conocimiento)' 서점입니다."

책을 통해 이성과 사유를 일깨우고 전파하는 것이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라고 했다. 책이 팔려야 그 목적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었다.

"책이 다른 매체들에 대체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나는 다른 것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책과 함께 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평생 글을 써온 사람이 책에 희망을 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 길모퉁이 서점 그가 언론 현역 은퇴 후 15년 자리를 지킨 육교 밑 사거리의 '길모퉁이 지식'서점
ⓒ 이안수
  
 '오래된 나무', 혹은 '물의 노인'이라는 의미를 지닌 나무를 그린 그림, 간혹 뉴스를 듣는 오래된 라디오, 앉아서도 균형잡힌 세계를 읽고자하는 의지가 담긴 지구의... 그의 서점은 그의 정신세계였다. 나와 헤어지면서 '당신과의 대화는 국제적 유대'라며 기뻐했다.
ⓒ 이안수
 
서점주인 프란시스코 마르티네즈 에르난데스(Frncisco Martinez Hernandez)는 69세로 인쇄매체의 기자로 글을 쓰며 살아온 사람으로 은퇴 후 15년째 이 길모퉁이 서점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서가 아래로 손을 뻗어 국배판크기의 12페이지짜리 신문을 꺼내 건네주었다.

"이것이 이 코너를 지키며 하고 있는 또 다른 일이라오."

- 단순히 이 신문을 여기서 판다는 의미가 아닌 것 같은데요?
"이 신문을 만들어요. 저는 편집자입니다."

- 이곳에서요?
"예. 나는 내 동료들과 함께 '노인 나무'라는 뜻의 이 신문, '엘 아후에후에테(EL AHUEHUETE)'를 만들고 있어요. 정확히는 '바람의 뿌리, 엘 아후에후에테(EL AHUEHUETE RAIZ AL VIENTO'지요."

- 이런 종이 신문은 원고를 쓰는 일 외에도 제작에 품이 많이 들어가고 또한 제작비가 만만치 않을 텐데 재정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독자들의 자발적인 협력으로 해가고 있어요."

- 필진은 어떻게 되고 독자는 얼마나 됩니까?
"10여 명의 필진과 1천 명 정도의 독자들이 있습니다."

- 발행주기는 어떻게 됩니까?
"월간입니다."

- 왜 힘겹게 신문을 만드시는 거죠?
"자율성이 완전히 보장된 상태에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쓰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 필진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지만 여러 분야에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고 책 좀 읽은 사람들입니다. 불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고 무엇보다 좌시하기보다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 어떤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범죄를 초래할 내용이나 도덕적으로 저촉되는 내용이 아니라면 권위나 법률에 대한 검열 없이 각자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가 제한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인 어떤 글도 실릴 수 있습니다. '라만차의 돈 키호테'가 자유가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가치 있는 황금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듯이..."
  
▲ 월간신문 그가 동료와 자발적 참여자들을 모아 펴내고 있는 월간신문 '바람의 뿌리, 엘 아후에후에테'
ⓒ 이안수
  
▲ 작가의 가방 몇 년간이나 동행했는지조차 잊은, 책 더미 위에 올려진 그의 낡은 가방. 그에게 나이는 오히려 자유의 불꽃을 고무하는 풀무로 기능하는 것 같다.젊음을 통해 쌓은 모든 역량을 나이 들어가면서 사회의 자원으로 환원하기 좋은, 적어도 불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나이.
ⓒ 이안수
 
그 신문에서 그는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즈 오브라도(Andrés Manuel López Obrador) 대통령 행정부가 2018년 12월부터 건설 중인 메가 프로젝트인 '마야 열차(TREN MAYA, Tsíimin K'áak)에 대해 이렇게 일갈한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부끄러워하소서. 인간이 그 행위로 주보다 우월하였음 나이다."

유카탄반도를 비롯한 멕시코 남동부의 경제와 관광 활성화 목적으로 주요 관광지와 도시를 연결하는 1,554km 달하는 이 철도건설 프로젝트는 고고학 유적지가 집중된 이 지역의 역사문화유산 훼손, 정글지역 산림벌채에 따른 복구 불가능한 환경파괴, 소음발생이 야생동물에 미칠 우려로 시민단체와 원주민 공동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되고 있다.

- 지금은 어떤 내용에 대해 쓰고 계십니까?
"아메리카 대륙의 이주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언제까지 이 길모퉁이 서점을 지키며 이 일을 계속할 예정입니까?
"기력이 다해서 더 이상 이곳에 나올 수 없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때까지요."

그는 노인으로서의 평온함을 사는 것보다 내면의 회오리바람으로 살기를 선택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 책이란?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UNAM)의 지역도서관 도서반납카트 옆에 붙은 레이 브래드버리의 경구. "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책을 불태울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게 만들면 된다."
ⓒ 이안수
 
책이 어떻게 진열되어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이 노인이 지키고 있는 부스를 한 바퀴 돌았다. 유리면에 매달려 있는 책들을 사진에 담자니 이 부스를 만나기 전에 방문했던 우남대학교(UNAM ; Universidad Nacional Autónoma de México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의 지역도서관 도서카트에 붙어있던 경구가 생각났다.

"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책을 불태울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게 만들면 된다."_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

마지막으로 얼굴 사진을 찍어도 될지를 물었을 때 꺼내든 것이 책더미 위에 얹힌 작은 가방 뒤의 솜브레로였다. 그가 만들고 있는 '노인나무'처럼 더 이상 멕시코 사람들이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만 여전히 지켜내야 할 '푸른 정신'같은 것이지 싶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