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는글쓰기] "자동차 배터리 꺼뜨리지 마라" 집 떠난 남편의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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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선 기자]
혼자 운전해서 마트에 다녀왔다. 그뿐인가 명절에는 아이들을 태우고 시댁에도 갔다. 장장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장롱면허였던 나다. 남편이 해외 취업으로 출국하면서 던진 숙제를 완수하기 위해 매주 한 번씩 비장한 각오로 주먹을 꽉 쥐고 자동차를 운행한다. 남편이 준 숙제는 이것이다.
"자동차 배터리를 꺼뜨리지 마라."
남편은 운전을 좋아하고 잘 했다. 그리고 차를 사랑했다. 그래서 운전이 익숙치 않은 나에게 핸들을 넘기는 법이 좀처럼 없었다. 어쩌다 부산 처가까지 장거리 운전을 하다 AI 주행 프로그램도 시범 운전을 할 수 있을 만큼 한산한 고속도로에 이르면 내가 운전을 교대해 주었으면 할 때도 물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근데 브레이크가 오른쪽 페달이야 왼쪽 페달이야?' 한 마디 하면 잠이 달아나 끝까지 이를 악물고 부산까지 가던 사람이었다.
▲ 남편은 떠나기 전 매주 한 번씩 차를 운행할 코스도 정해주었다. |
ⓒ elements.envato |
그러나 자기가 해외 취업을 할 줄 알았던 건지, 사실은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떨어졌기 때문이겠지만, 작년부터는 나에게 계속 운전을 시키고 본인은 조수석을 자처했다.
남편이 운전하다 졸리고 피곤할 때 운전을 해서 부산까지 간 적도 있고 시댁까지 간 적도 있지만 조수석에 남편이 타지 않은 채로 운전을 해 본 적은 없었다. 남편이 출국하기 전까지는.
내 뇌구조 속에는 운전, 주유, 세차, 차량 검사, 동계 타이어 교체 같은 차와 관련된 영역은 전혀 없었다. 마치 남편의 뇌구조 속에 된장찌개 끓이는 법, 밥솥 안 밥의 상태와 재고, 샐러드의 유통기한과 관련된 영역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남편이 체코에 있는 대학에 채용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시부모님, 특히 가장 노릇을 여태 맡아온 며느리에게 항상 고마움을 표현해 왔던 시어머니가 가장 반가워하실 줄 알았다. 이때까지 니가 수고했는데 이제 짐을 좀 덜게 되어 다행이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남편 혼자 외국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게 확실해진 다음 어머님의 표정은 바로 어두워지셨다. "애비가 혼자서 어떻게 하겠냐"며 걱정을 하셨다. "어휴, 애비 나이가 몇인데 자기 한 몸 못 돌볼까요. 걱정 마세요"라고 했지만 사실은 나도 그리 미덥진 않았다. 그래서 출국 전까지 남편에게 없는 부분을 채워주려고 했다.
"끼니는 그냥 때 되면 먹어요. 배가 고프네 안 고프네 하면서 불규칙하게 때우지 말고. 매 식사에는 탄수화물, 단백질, 식물섬유소를 골고루 먹어야 해요. 식물의 피토케미컬은 색깔에 따라서도 다르다고 하니 초록잎만 먹지 말고 파프리카 같은 여러 색깔 채소를 챙겨먹어요."
매일 식사를 차려주면서 염불을 외듯 되풀이해서 말해주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내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고 애썼다. 차를 내가 몰고 주유소에 갔을 때도 직접 주유를 해본 적이 없다는 걸 떠올리고는 주유소에서 한 단계, 한 단계 가르쳐 주었다. 매주 한 번씩 차를 운행할 코스도 정해주었다.
우회전만으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대형마트였다. 매주 한 번씩 재택근무 중 점심 시간에 마트에 간다. 길에도 차가 적을 법하고 우리 아파트 주차장도 대형마트의 주차장도 한산할 시간대를 고심해서 고른 것이다.
▲ 남편이 찍어보내준 저녁 식사 |
ⓒ 최혜선 |
남편은 샐러드를, 샌드위치를, 스테이크를, 굴라쉬를 먹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서 나에게 보낸다. 나는 운전을 할 때마다 얌전히 주차된 차를 찍어서 보낸다. 서로 잘 했네. 잘 했네. 칭찬을 주고 받는다.
남편의 부재로 가장 영향을 받는 것은 운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우리집의 청결도 그에 못지않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은 냄새에 예민해서 싱크대 근처에 오면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난다며 갖다버리라고 할 때가 많았다. 나에게는 전혀 거슬리지 않는데. 그때마다 나는 '거슬리는 본인이 갖다버릴 것이지 왜 꼭 날 시킨대?' 궁시렁거리며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러 나가곤 했다.
그런데 그 지적을 해줄 남편이 없으니 이제 내 코에 악취가 나고서야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게 되었다. 부쩍 늘어난 싱크대 주변 초파리를 잡으면서 아, 남편이 광산 속 카나리아 같은 역할이었구나 알게 되었다.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며칠에 한 번씩은 로봇청소기로 물걸레질을 해서 마루에 광을 낸 것도 그였다. 빨래를 건조기에서 꺼내와 거실에 내려놓으면 어서 정리하라고 잔소리를 하든지 빨래의 주인들을 찾아주는 것도 남편이었다. 그것도 며칠째 빨래가 거실에 널부러져 있는 것을 모르는 척하며 지내다가 깨달았다.
나는 남편바라지, 남편은 집바라지
공부하는 남편바라지를 하며 나만 수고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집에서 적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18년 동안 서로의 곁에서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며 하나의 완전체로 기능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가 그의 빈자리를 경험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알게 된 것이다. 사람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티가 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아빠를 공항에서 배웅하고 돌아오던 아들은, 이제 집 문을 열면 아빠가 거실에서 넷플릭스를 보다가 일어나지 않음을 상기했다. 입을 한껏 벌리고 웃으면서 "아들 왔어?" 하며 배에 잽을 툭툭 날리다 잽을 막는 손을 피해 엉덩이를 치며 개구쟁이처럼 주위를 맴돌던 아빠를 기억했다.
역할로 서로의 부재를 느끼는 나와 달리 아이는 아빠가 차지하고 있던 정서적 존재감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셋이서 한 명의 부재를 느끼지만 혼자가 된 그가 느끼는 우리 셋의 부재는 어떤 부피와 무게로 그의 일상을 채우고 있을까 생각한다.
그럴수록 씩씩하게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잘 살아보자고 다짐한다. 혼자서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같이 살기도 좋다는데 서로가 그런 사람이 될 기회가 온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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