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들의 K드라마 시상식, 대한체육회장의 해병대 훈련...그 치명적인 엇박자 [IS포커스]
이은경 2023. 10. 10. 07:25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무엇이 가장 인상적이었느냐고 묻는다면 ‘한국 선수들의 표정’이라고 답하고 싶다.
대표적인 화제의 장면도 있었다. 9월 29일 열린 탁구 혼합복식 시상식이다.
한국의 신유빈-임종훈, 전지희-장우진은 중국 선수들에게 금-은메달을 내주고 동메달을 획득했다. 시상자가 한국 선수들 목에 메달을 걸어주는데, 이때 장우진이 파트너 전지희의 유니폼 목부분 깃이 메달에 눌려 접힌 걸 보고 세심하게 이걸 정리해줬다. 하필 이 장면이 경기장의 대형 전광판에 클로즈업 됐다. 순간 중국 관중이 엄청난 환호를 보낸 것이다. 어리둥절해하던 장우진이 상황을 파악하고 머쓱하게 웃는 장면도 연이어 잡혔다.
중국 관중이 환호한 건 장우진의 다정한 배려가 ‘K드라마’로 불리는 한국 드라마의 연애 장면처럼 느껴져서였다. 이를 본 임종훈도 장난스럽게 신유빈의 유니폼 깃을 다시 정리해줬고, 신유빈이 질색을 하며 폭소를 터뜨리는 장면까지 이어졌다. 수준급의 실력과 몸에 배인 다정한 매너와 미소에서 뿜어나오는 매력, 과연 이게 금메달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폄훼할 수 있을까.
기성세대가 기억하는 한국 선수들은 지금과 많이 다르다. 30여년 전 한국 선수들은 마치 이번 대회 중국이나 북한 선수들처럼 잔뜩 굳은 표정으로 시상대에 섰다. 은메달을 따고 서러워서 울거나 금메달 아니면 패배라고 고개 숙인 선수도 자주 봤다.
한국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웃고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스포츠의 체질도 많이 바뀌었다. 수영이나 피겨 같은 이른바 ‘선진국형 종목’에서 세계 챔피언이 나왔고, 손흥민으로 대표되는 최고 인기 종목의 월드클래스 스타도 나왔다. 실력도 최고지만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진정한 슈퍼스타들이 탄생하고 있다.
어쩌면 중국 같은 경직된 분위기가 성적을 내기에 더 효율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활짝 웃고, 당당하게 말하는 한국의 스타들이 아시아 대회에서 ‘인싸’로 다른 나라 선수들의 선망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이번 대회를 지켜본 한국인들에게 꽤나 큰 자부심을 줬다.
이런 맥락에서 대회 마지막 날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의 발언은 그야말로 어리둥절한 ‘역주행’이었다.
이기흥 회장은 8일 항저우에서 열린 대한민국 선수단 해단식에서 유도, 레슬링 등 전통적인 효자종목의 부진에 대해 “요즘 선수들은 새벽 운동을 안하려고 한다. 이게 현실이다”라고 걱정했다.
이어 이기흥 회장은 파리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았고, 준비 시간이 부족하다면서 뜬금없이 “내년에는 국가대표 선수는 입촌 전에 해병대 가서 극기훈련을 할 것이다. 나도 같이 하겠다”고 선언했다. 새벽 운동을 피하는 젊은 선수들의 정신력을 질타하면서 정신력 강화 방안으로 해병대 훈련소 입소를 선언한 것이다.
스포츠팬들은 ‘웬 꼰대 발언이냐’면서 엄청난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시대가 변하면 이에 맞는 동기부여를 제시하고 선수들을 끌어가는 게 진정한 리더다.
우려되는 건 대한체육회의 ‘뒷걸음질 해프닝’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항저우 대회를 앞두고 장재근 진천선수촌장은 선수들의 집중력 향상을 위해 밤 10시 이후 선수촌의 와이파이를 끊었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정작 젊은 선수들은 대부분 데이터 무제한 서비스를 이용하기 때문에 휴대폰 이용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 훈련을 마친 후 밤시간 동안 와이파이를 이용해 인터넷으로 해외 경기 자료를 수집했던 박봉의 코치들이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다.
해병대 훈련을 받고 한겨울 얼음물에 입수하는 게 좋은 멘털 훈련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강압적으로 시키느냐, 선수가 자발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대한체육회가 할 일은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지옥 훈련을 하겠다며 달려들도록 동기부여를 내미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말이다.
이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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