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인 목사·선교사·한국교회 ‘세겹줄’ 헌신… 떼라에 첫 학교 우뚝
<2부 당신이 희망 전도사> 동티모르 마슬리둔 알파떼라학교
“걸어가면 2시간쯤 걸려요. 비가 오는 날엔 그냥 포기하죠. 날이 더운 날 걸어가다가 쓰러진 적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한 달에 3번밖에 못 간 적도 있고요.”(아르날도)
아홉 살 아르날도군이 말하는 목적지는 다름 아닌 학교다. 그가 사는 곳은 동티모르 수도 딜리의 외곽에 자리 잡은 마슬리둔 마을이다.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인 아르날도군은 1학년 때까지 딜리 도심 공항 근처에 있는 학교로 통학해야 했다. 집으로부터 15㎞나 떨어진 곳이었다. 동갑내기 아프릴리아양도 지난해 전학하기 전까지 1시간 넘게 걸어 등교했다. 두 친구에게 지금은 학교 오는 데 몇 분쯤 걸리는지 물었다. 해맑은 눈망울에 미소를 걸친 아이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5분이요.”
최근 찾아간 마슬리둔 지역은 수도 딜리에서 사각지대에 내몰린 이들이 모인 마을이다. 동티모르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358달러(2021년 기준)에 불과해 1970년대 한국의 경제 상황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도 도심 물가와 거주비는 소시민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수년째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지속돼 도시에 밀집한 시민들이 외곽 지역으로 밀려 나오며 마슬리둔 마을 언덕과 산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달동네’를 형성했다. 정부의 공식 거주 집계가 이뤄지지 않는 마을에 학교가 세워질 리 없었다.
14년째 동티모르에서 사역 중인 어린이전도협회 김진수(55) 선교사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통학 거리가 멀어진 아이들은 등교 대신 인근 시장에서 짐꾼으로 일하며 용돈벌이에 나서기 일쑤고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 4~5학년 나이에도 글을 못 읽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고 설명했다.
2015년 이 마을에 협회 센터를 짓고 전도 사역을 펼치던 김 선교사는 동역해오던 현지인 도밍구스(48) 목사의 집에서 어린이를 위한 글읽기 수업과 성경공부 모임을 열었다. 2017년 여름, 서울광염교회(조현삼 목사) 단기선교팀이 이곳을 찾으면서 새로운 희망이 동트기 시작했다. 마슬리둔 마을 상황을 전해 들은 이 교회 성도가 학교 건축을 위한 자금을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 도밍구스 목사가 사재를 털어 마련한 땅을 내놨다.
그로부터 1년 뒤 동티모르 현지인 목회자와 한인 선교사, 한국교회가 세 겹줄이 되어 헌신한 열매가 학교로 세워졌다. 이름은 ‘알파떼라(Alfa-Terra)학교’. 하나님의 땅(Terra)에 세워진 첫 번째(Alfa) 학교라는 뜻이다. 유치원(4~6세)부터 초등학교 2학년(7~8세)까지 30여명으로 출발한 학교는 해마다 학생이 늘어 지금은 6학년 과정까지 학생 240명의 꿈이 무르익는 현장이 됐다.
학교장을 겸임하는 도밍구스 목사는 “재학생의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교실이 더 필요한데 그때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증축에 필요한 건축비를 보내줘 기적처럼 운영을 지속할 수 있었다”며 감사를 전했다.
매주 금요일 열리는 채플 시간엔 가톨릭 국가인 동티모르(97%가 가톨릭 신자) 공교육 현장에선 보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진다. 이날 찾은 학교에선 지난 4월 증축감사예배를 드린 강당에서 채플이 열리고 있었다. 노란색 교복을 맞춰 입은 학생들은 한국 성도들에게도 익숙한 찬양을 테툼어로 부르며 함께 기도를 나눴다.
방과 후 만난 학부모 플러리아나(36)씨는 “알파떼라학교가 생긴 뒤로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 엄마들 사이에선 입소문이 나 도심에 있는 공립학교에서 아이를 전학시키기 원할 정도”라며 웃었다. 그가 말하는 자부심엔 전에 없던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예전엔 동네 곳곳에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도박판을 벌였는데 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부터 생활 태도가 바뀌면서 부모들까지 도박을 멀리하게 됐다. 학교가 가정과 동네를 변화시킨 셈”이라고 소개했다.
개신교에 대한 경계심이 누그러진 것도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부터다. 도밍구스 목사는 “처음엔 ‘성모 마리아도 안 믿는 비상식적인 사람들이 학교를 짓는다’며 손가락질을 하던 마을 주민들이, 지금은 동네에서 만날 때마다 중학교를 설립해주면 안 되겠냐고 요청한다”고 전했다.
1975년 전쟁둥이로 태어난 도밍구스 목사에게 한국교회와의 인연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계획으로 여겨진다.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의 식민 통치를 무려 450년간 받은 땅이다. 75년 독립을 이룬지 불과 9일 만에 인도네시아가 침공하면서 또다시 24년을 통치받아야 했다. 국민 4분의 1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눈물 나는 아픔의 땅에 복음의 씨가 떨어졌다고 했다.
“정령을 숭배하던 부모님이 전쟁 통에 만난 군인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으면서 신앙을 갖게 됐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독일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지요. 김 선교사님을 만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게 된 것, 한국교회의 도움으로 학교를 건축할 수 있게 된 것, 절망만 도사리던 마을에 세워진 학교가 주민들의 희망이 되고 교육부 인가를 받게 된 것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일 겁니다. 한국이 일본 식민통치, 6·25전쟁이라는 아픔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동티모르인들의 마음에 한국인에 대한 공감이 자리 잡은 배경이지요. 이 얼마나 기적 같은 만남입니까(웃음).”
2002년 역사적인 독립과 함께 제정된 동티모르의 국기에는 ‘희망의 빛’을 의미하는 별이 그려져 있다. 도밍구스 목사는 “마슬리둔 마을에서 시작된 작은 빛이 다른 지역은 물론 동티모르 전체로 확산돼 복음이 퍼져나가고 사회를 변화시키게 되길 소망한다”고 전했다.
딜리(동티모르)=글·사진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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