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한일 관계, 계란으로 바위를 치다
"삐리리~."
도쿄특파원 시절이던 2019년 초가을 어느 날, 새벽 6시에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당연히 알람이려니 했는데 아니었다. 한국 정부의 고위 인사가 서울에서 걸어 온 전화였다. "아니, 이건 완전 오보 아닙니까~." 고상한 인품의 그가 다짜고짜 당일 중앙일보에 실린 한·일 관계 단독 보도에 대해 항의했다. 기사는 당시 양국의 뇌관이던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 비공개로 새로운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해당 기사는 3박 4일간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온 집권 자민당 유력 정치인의 기자회견을 그대로 옮겨 놓은 수준이었다. 회견은 서울에서 만난 한국 정부 인사들과의 대화를 소개하는 방식이었고, 새벽에 항의 전화를 한 인사 역시 그 정치인이 접촉했던 인물이었다. 한국 언론의 다른 특파원들은 회견의 존재조차 몰랐으니 자연스럽게 본지의 특종이 됐다. 회견을 그대로 옮겨 적은 기사가 오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런 기사 때문에 거친 항의를 받을 정도로 당시의 취재 환경은 살벌했다.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일본에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것 자체도 죄악시됐다. 점잖은 체면에도 득달같이 새벽 국제전화를 걸어야 할 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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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회고 속 '죽창가 한일 관계'
관계 개선 이면엔 수많은 노력들
이경미의 피아노도 바위 친 계란
」
비슷한 시기 더 황당한 일도 겪었다. 도쿄 시부야 부근의 선술집에서 주일 한국대사관의 외교관과 마주했을 때다. 당시 중앙일보는 삐걱대는 한·일 관계의 출구를 찾기 위해 결성된 한반도평화만들기 산하 한일비전포럼의 활동을 집중 보도했다. 전·현직 외교관과 정·재계 인사, 한·일 전문가들이 참여한 포럼이었다. 그런데 이 외교관은 "중앙일보의 저의가 뭐냐. 무슨 꿍꿍이로 정부를 흔들어대느냐.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쏟아냈다. 정부의 반일 드라이브에 왜 반기를 드느냐는 주장에 기가 막혀 육두문자까지 날리며 다퉜던 기억이 난다. 술자리는 당연히 엉망이 됐다. '죽창가'로 요약되는 집권 세력의 대일 강경 코드에 영혼을 파는 관료의 민낯이었다. 정권도 바뀌었고 대일 기조도 확 바뀌었지만, 전 정부를 억지 비호했던 그 외교관은 멀쩡하게 잘나가고 있다니, 그 역시 황당한 일이다.
문재인 정권 시절의 불편한 기억을 소환하는 건 최근 본지가 연재하기 시작한 박근혜 회고록의 영향이다. 박 전 대통령은 "공들여 만든 (2015년의) 위안부 합의가 문재인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사실상 폐기 처분'됐다는 소식을 옥중에서 들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한 기분에 휩싸였다"고 회고했다. 위안부 합의 뒤집기는 한·일 관계 암흑기의 서막이었다. 그 뒤론 거침없는 죽창가 무드였고, 기자는 그 시절에 특파원을 지냈다.
역사의 장면마다 여러 부류의 등장인물이 있다. 한·일 관계도 그렇다. 침묵하는 이들이 있고, 육두문자를 쏟아냈던 도쿄의 외교관 같은 훼방꾼들도 있다. 반대로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마치 계란으로 바위 치듯 관계 개선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일견 둔탁해 보이는 '결단'에 바위가 갑자기 깨진 것 같지만, 그 이면엔 바위에 금이 가도록 만든 많은 이의 노력이 쌓여 있다. 민주당 출신임에도 징용 문제 해결을 위해 획기적 제안을 내놓았던 문희상 전 국회의장, 틈만 나면 양국을 오가며 인식의 간극을 좁히려 애쓴 양국 의원연맹과 친선협회 간부들, 수많은 인사이트를 제시했던 한일비전포럼 참가자들도 마찬가지다. 내달 7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일본 엑셀시오 4중주단과 '한일 우정 음악회'를 여는 피아니스트 이경미(경남대 명예교수) 역시 계란으로 바위를 쳤던 인물이다. 그는 양국 관계가 최악이던 2019년 5월 도쿄 한복판에서 일본 기타리스트와 우정 콘서트를 열었다. "냉각된 관계를 녹이는 데 작은 힘을 보태고 싶다"는 다짐이 아직도 귓전에 쩌렁쩌렁하다. 훼방꾼들이 활개를 쳐도 역사가 전진하는 건 바로 이런 사람들 덕분이다.
서승욱 정치디렉터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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