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노벨상 후진국’ 언제까지 방치할건가

2023. 10. 10.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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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전 인문대학장

해마다 가을이 되면 노벨상 수상자 발표 소식이 관심을 끈다. 올해도 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평화상까지 6개 부문 수상자가 발표됐다. 모든 수상자가 화제이지만, 헝가리 출신 커털린 커리코(68) 박사는 영화처럼 극적인 삶으로 특히 주목받았다.

생명공학 기업 바이오엔테크 수석부사장으로 재직 중인 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드루 와이스먼(64) 교수와 함께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인류의 무기인 mRNA 백신의 핵심 기술을 개발한 공로다. 보수적인 노벨상 위원회가 mRNA처럼 지금도 개발 중인 기술에 상을 준 점도 이례적이지만, 세간의 기준으로 보면 변변한 경력이 없는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 올 생리의학상 수상자 스토리
미국 대학의 연구 인프라 한몫
R&D 예산 삭감한 한국과 대비

시론

헝가리 태생의 커리코 박사는 대학생 시절부터 이후 평생의 과업이 된 이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헝가리는 과학 분야에서만 노벨상 수상자를 9명이나 배출했다. 19세기에 의사의 손 오염 때문에 산모의 사망률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소독법으로 많은 산모를 살린 과학자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도 헝가리 출신이니, 커리코 박사는 제멜바이스를 포함한 헝가리 과학자들의 ‘학문적 후예’인 셈이다.

커리코 박사는 평생의 과업인 mRNA 연구를 제대로 수행하려고 미국으로 건너가 고생 끝에 펜실베이니아대학 교수직을 얻었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성과도 금방 나오지 않는 mRNA 연구에 몰두하는 그에게 대학은 관용을 무한정 베풀지 않았다. 10여 년 동안 성과를 내지 못하자 그는 교수직을 잃고 연구원으로 강등됐고, 연봉도 절반으로 삭감됐다.

보통 이럴 경우 학계에서는 수모를 못 견디고 사직한다. 하지만 그는 연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진 펜실베이니아대학에 남는 길을 택했다. 그의 바람막이를 자임한 사람이 이번에 노벨상 공동 수상자인 와이스만 교수였다.

이런 커리코 박사의 인간승리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극적이다. 사람들은 그의 강인한 의지와 노력에 찬사를 보내지만, 그의 성공담을 가능하게 만든 배경은 간과한다. 만약 펜실베이니아대학의 튼튼한 연구 인프라가 없었다면 애초 그의 이야기가 가능했을까.

그의 이야기에서 야박하게 교수직을 박탈하고 연봉을 깎은 대학은 성공한 영웅을 위한 악역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그가 그렇게 불리한 점을 감수하고도 대학에 남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이야기에서 또 다른 주인공은 그런 신데렐라를 가능하게 한 미국 대학의 연구 인프라다.

펜실베이니아대학이 10여 년 동안 성과를 못 내는 커리코 박사를 교수로 남겨서 이런 결과를 얻었다면 이야기는 더 아름다웠겠지만, 그건 현실과 동떨어진 신파 소설이다. 미국의 대학은 신파가 아니라 튼튼한 연구 인프라로 세계의 인재를 끌어모은다. 세계 최고의 기초과학 인프라와 학술 생태계가 오늘날 미국의 힘의 원천이다.

그러니 교수에서 연구원으로 강등돼도 그 인프라에 남는 길을 택하고, 거기서 다시 기회를 얻어 연구를 계속한다. ‘패자 부활전’이 가능한 것이다. 인류가 코로나와 싸워 지지 않은 것도 이런 인프라 덕분이다.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말로는 모두가 연구 인프라의 중요성을 역설하지만, 제대로 실천하는지 의문이다. 넉넉하지 않은 국가 연구비 예산에서 3조4000억원이 삭감돼도, 정책담당자도 정치권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다고 성토한다.

노벨상을 만드는 건 커리코 박사처럼 10여년간 성과 없이 한 우물을 파도 품어주는 인프라인데, 나무에 열린 열매만 볼 뿐 그걸 키워낸 땅과 농부의 숨은 노력은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에는 커리코 박사 같은 ‘불량 연구자’를 품어줄 곳이 없다. 유능한 젊은 연구자가 기초과학 연구에 매진하는 ‘어리석은 모험’을 왜 하겠는가.

한국은 ‘노벨상 후진국’이다. 노벨상을 못 타서 후진국이 아니라, 노벨상을 탈 만한 인재를 고사시키니 후진국이다. 우리 인재는 물론 타국 인재까지 끌어들여 품는 연구 인프라를 만드는 게 정말로 불가능한 일인지 커리코 박사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고 다시금 생각해본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재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전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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