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병건의 시선] 또 등장하는 트럼프 효과
언론사가 자사의 여론조사를 놓고 추세와 맞지 않으니 유의하라고 발표한다면 이는 보기 드문 사례다. 워싱턴포스트(WP)가 지난달 말 그런 보도를 내놨다. WP와 ABC방송이 실시한 미 대선 여론조사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42%)을 도널드 트럼프(51%)가 9%포인트 앞선 결과가 나오자 ‘이상치(outlier)’일 수 있다고 밝혔다. 이상치 성격이 다분한 건 맞다. 지난 한 달간 미국에서 진행된 23개 전국단위 양자 대결 여론조사(리얼클리어폴리틱스 기준)에서 바이든과 트럼프는 대부분 오차범위 내에서 엎치락뒤치락했다. 트럼프가 두 자릿수 차이에 육박하며 앞선 건 이 여론조사가 유일하다.
■
「 7년 전 예상 못 한 트럼프 승리
이젠 ‘눈에는 눈’ 재선 공약
재선하든 안 하든 대비 필수
」
그럼에도 왠지 떨떠름한 느낌이 드는 건 7년 전 미국 대선이 떠올라서다. 돌이켜보면 당시 대선은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박빙 승부였다. 하지만 미국 주류 미디어는 트럼프의 승리 가능성을 사실상 일축했다. 대선 한 달여 전 우연한 기회에 미국의 한 외교관과 가볍게 대선을 얘기할 자리가 있었다. 그는 사견을 전제로 “이곳(워싱턴 DC)에서 트럼프는 진지한 얘깃거리가 아니지만 조금만 벗어나 외곽으로 나가면 곳곳에 트럼프·펜스 깃발이 꽂혀 있으니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의 사견이 주류 미디어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7년 전 미국 주류 미디어도, 그에 의지한 한국 언론도 오류를 피하지 못했다. 트럼프의 미국에 동의할 수 없으니 트럼프가 앞설 수 있다는 현실을 집단적으로 외면했다. 당시 워싱턴 특파원으로 유세 현장에서 느꼈던 강렬한 온도 차는 주류 미디어의 보도에선 잘 드러나지 않았다. 구름처럼 지지자들이 몰린 트럼프 유세장엔 그를 향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백인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눈빛이 살아있었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 유세장은 민주당 당원들이 가족, 지역 주민과 함께 참여해 즐기는 푸근한 마을 집회 같았다. 열정과 환호는 트럼프 쪽에 있었다.
미 대선까지는 아직 13개월이나 남아 있고, 내년 3월 ‘수퍼 화요일’ 공화당 경선에서 이변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현재 기준 트럼프는 대선 상수다. 위에서 인용했던 지난 한 달 23건의 여론조사 중 바이든이 앞서는 결과는 7건, 동률이 7건, 트럼프가 앞서는 조사가 9건이다. NBC방송 조사의 경우 바이든과 트럼프가 모두 46% 동률로 나타났는데, 이는 3개월 전 같은 기관의 조사(바이든 49% 대 트럼프 45%)에서 바이든이 하락한 결과다.
무엇보다도 ‘트럼프 효과’는 현재진행형이다. 그가 내년에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건 안 되건, 현재 ‘공화당 내 압도적 1등 주자’인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지금 미국 유권자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그의 대선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대통령 재임 중 대표적 치적 중 하나가 “(민주당 행정부에서) 한국과 맺었던 끔찍한 협정”(한·미 자유무역협정)의 개정이다. 트럼프의 대표적 경제 공약이 ‘트럼프 상호호혜무역법’인데 “인도, 중국, 또는 다른 나라가 100%, 200% 관세로 우리를 때리면 우리도 똑같은 관세로 때리겠다”며 “눈에는 눈”이라는 법이라고 한다. 중국과의 관세 전쟁이니 한국에도 파장이 불가피하다. “바이든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인해 미국 달러가 중국 전기차 업체 보조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겠다”고 공약했는데, 이는 IRA보다 더욱 엄격한 전기차 배터리 규제일 것이니 이런 공약이 회자하는 게 한국 관련 업계엔 유리할 리 없어 보인다.
안보에선 무임승차론 여론을 자극하고 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지원에 2000억 달러를 썼는데 유럽은 소액만 썼다”며 우크라이나 지원에 들인 비용을 유럽에서 받아내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한국과 일본으로도 불똥이 튈 수 있다. 그러면서 “불필요한 해외 전쟁”엔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다.
미국 유권자에게 현찰 정서를 자극하는 트럼프 효과를 또 대비해야 할 때가 왔다. 7년 전 트럼프 승리 가능성을 무시했던 게 당시의 실패였다면, 이번엔 트럼프가 패배하면 미국이 ‘트럼프 재등장 이전’으로 자연스레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는 게 반복된 실패다. 트럼프가 대선전에서 진다 해도 그가 미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킨 미국 우선주의까지 소멸하는 건 아니다. 과거 트럼프의 국경장벽을 비난했던 민주당과 바이든 정부가 대선을 앞두고 국경장벽 건설을 재개하는 것처럼 대선 이후 트럼프가 사라진다 해도 트럼프 효과는 이어진다. 트럼프가 백악관에 재입성하면 트럼프 효과가 아니라 트럼프발 직격탄으로 확산할 수 있다. 대선 이후 자국 이익 중심주의가 더 강화된 미국을 상정해서 한·미 관계에 미칠 파장을 어떻게 최소화할지를 놓고 대비할 때가 다가왔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디렉터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朴 절박해서 바꾼 ‘당색=빨강’…유승민 대놓고 파란옷 입었다 [박근혜 회고록 4] | 중앙일보
- "이젠 '초밥왕' 만화가가 내 단골"…日 미쉐린 별 딴 최초 한국인 | 중앙일보
- 文과 조깅하던 盧 한마디에…'청와대 미남불' 110년 비밀 풀렸다 | 중앙일보
- "홍삼 먹어보니" 조민도 삭제 당했다…적발 3배 폭증한 이 광고 | 중앙일보
- 독일 여성, 옷 벗겨진채 하마스에 실려갔다…끔찍했던 음악축제 | 중앙일보
- "택배기사요" 새벽 원룸 초인종 누른 40대, 벽돌 들고 있었다 | 중앙일보
- 한국 오려다 일본 간다…동남아 관광객 막는 ‘K-ETA’ 논란 | 중앙일보
- [단독] 당선무효 선거사범 '먹튀' 230억…19명은 또 출마했다 | 중앙일보
- "끼지마" "미친짓"…이스라엘 지지 글 공유했다 욕먹은 미국 셀럽 | 중앙일보
- 임신·결혼 한꺼번에 알린 그룹 라붐 해인 "19세부터 만난 인연"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