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 골프 어떻게 생각했냐고요?”…163주 1위 고진영이 답했다
“지난번 인터뷰에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주위에서 그러더라고요. 너는 아직 그런 조언을 할 때가 아니라고 말이죠. 그래서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여자골프의 현재와 미래를 묻자 고진영(28)은 잠시 주저하며 뜸을 들였다. 현역 선수로서 자세한 이야기는 하기 어렵다면서도 하고픈 말은 똑부러지게 꺼냈다. 여자골프 세계랭킹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163주) 1위를 지킨 고진영을 9일 홍콩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전날 끝난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LET) 아람코 팀 시리즈를 준우승으로 마치고 귀국 채비를 하던 고진영은 “내가 1라운드부터 치고 나가니까 다들 우승을 예상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골프에서 ‘당연한 우승’이란 없다. 내가 지난 6년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뛰면서 깨달은 사실이다”고 했다.
고진영은 6일 홍콩 골프클럽에서 개막한 이번 대회에서 정상을 향해 순항했다. 1라운드에서 보기 없이 버디만 8개를 잡아 2타차 단독선두로 치고 나갔다. 다음날에는 3타를 줄여 린시위(27·중국)와 11언더파 공동선두로 2라운드를 마쳤다. 그런데 8일 최종라운드를 앞두고 뜻하지 않은 변수가 생겼다. 태풍 고이누가 홍콩 인근으로 북상하면서 LET는 마지막 3라운드를 취소했다. 대신 공동선두 고진영과 린시위의 연장 경기만 치르기로 했다.
395야드짜리 18번 홀(파4)에서 열린 1차 연장에서 둘은 나란히 보기로 비겼다. 2차 연장에선 린시위가 15m짜리 버디 퍼트를 집어넣으면서 우승을 가져갔다. 고진영은 “아무래도 2라운드 때 기록한 보기 2개가 아깝게 느껴졌다. 하나만 하지 않았더라도 2라운드를 단독선두로 마쳐 연장을 치르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면서 “그래도 이번 대회 직전 허리를 삐끗해 진통제를 먹고 뛴 점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고 생각한다”고 웃었다.
고진영은 올여름을 유난히 힘겹게 보냈다. 빡빡한 비행 일정을 견디지 못했다. 7월 말 메이저대회 에비앙 챔피언십 출전을 위해 미국에서 프랑스로 건너간 뒤 8월 초 잠시 귀국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를 뛰었다. 이어 AIG 여자 오픈이 열리는 영국을 거쳐 8월 말 CPKC 여자 오픈 개최지인 캐나다로 향했다. 고진영은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 때는 내가 어디 있는지조차 헷갈리더라. 그 심했던 여름 더위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또, 둘째 날에는 시차 문제로 아예 잠을 자지 못해서 결국 기권을 하고 말았다”고 했다.
체력의 한계를 느낀 고진영은 CPKC 여자 오픈 이후 한 달 넘게 휴식을 취했다. 국내로 돌아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몸을 재충전했다. 간간이 샷도 점검하고 클럽 피팅도 새로 했지만, 쉼표는 확실하게 찍었다. 고진영은 “이번 대회를 통해 ‘내가 그동안 잘 쉬었구나’라고 느꼈다. 휴식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시간이었다”고 미소를 지었다.
싱가포르와 미국, 영국, 홍콩,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차례로 열리는 아람코 팀 시리즈는 LET가 지난해 말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와 손을 잡고 출범시킨 5개짜리 대회다. 개별 총상금은 100만달러(약 13억5000만원)로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세계랭킹이 높은 선수들에게 적지 않은 초청료를 지급한다고 알려진다. 이 돈은 천문학적인 오일머니에서 나오는데 PIF는 한때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와 대립각을 세웠던 LIV 골프의 자금줄이기도 하다. 대회 명칭으로 쓰이는 아람코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석유기업이다.
LIV 골프는 지난 6월 PGA 투어와 전격 합병을 선언하면서 전쟁을 멈췄다. 그러면서 올해 초까지 이슈가 됐던 여자골프계 진출 소식도 잠잠해졌다. 고진영은 “사실 LPGA 투어 구성원들 가운데 일부는 LIV 골프의 적극적인 투자를 내심 원했다. 선수들끼리도 ‘얼마 받으면 갈래?’라는 질문을 주고받기도 했다”면서 “PGA 투어처럼 여기도 의견이 갈렸다. 현실을 중시하는 진영과 가치를 존중하는 쪽으로 나뉘었다. 나는 2018년 LPGA 투어 데뷔 때부터 가졌던 명예의 전당 입성이라는 꿈이 있다. 그래서 만약 새로운 무대가 생기더라도 ‘가지 않겠다’는 쪽이었다”고 했다. 여자골프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는 “예측불가”라고 답했다.
고진영은 8월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 개막 기자회견에서 한국 여자골프의 현실을 에둘러 이야기했다. KLPGA 투어가 발전해 국내 선수들의 환경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해외 진출의 필요성은 여전하다고 강조했다. 2017년 10월 국내에서 열린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우승을 통해 LPGA 투어로 직행했던 고진영은 “당시 인터뷰 이후 주위에서 ‘너는 아직 그런 조언을 할 때가 아니라’고 하더라. 그래서 더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다”면서도 “나 역시 6년 전 LPGA 투어 도전을 놓고 걱정이 많았다. 국내 선수들의 고민이 이해가 된다. 그래도 후배들이 한 번쯤은 해외 진출을 고려하면 어떨까 한다. 도전하면 그만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번 대회는 최근 LPGA 투어의 흐름을 반영하듯 아시아권 강자들이 여럿 출전했다. 고진영과 린시위를 비롯해 베트남계 미국인인 세계랭킹 1위 릴리아 부(26)와 중국계 미국인인 로즈 장(20) 등이 자존심 대결을 벌였다. 고진영은 “요새 한국이 아닌 다른 아시아권 선수들이 왜 이렇게 좋은 성적을 내는지 많이들 물으신다. 옆에서 봤을 때는 이들 모두 정말 열심히 훈련한다는 점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또, 각자의 장점을 잘 살리는 플레이가 잘 체득돼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라고 본다”고 평가했다.
LET 나들이를 마친 고진영은 19일 경기도 파주시 서원힐스 골프장에서 개막하는 LPGA 투어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을 통해 국내 골프팬들을 만난다. 2021년 우승의 연을 맺었던 대회지만, 지난해에는 손목 부상 여파로 3라운드를 앞두고 기권했다.
LPGA 투어 통산 15승을 기록 중인 고진영은 “속으로 ‘약해진다, 약해진다’고 하면 정말 약해지더라.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 늘 노력하고 있다”면서 “이제 4개 대회 정도가 남았다. 언제나 그렇듯 올 시즌도 잘 마무리하고 싶다. 그래야 1년을 돌아봤을 때 후회가 남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홍콩=고봉준 기자 ko.bong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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