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편한대로 해봐" 송중기도 믿었다…칸까지 간 '괴물 신인'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한 소년에게 네덜란드는 꿈과 희망의 나라다. 중식당 배달 아르바이트로 모은 쌈짓돈과 네덜란드 여행 책자를 상자 속에 소중히 간직하며 떠날 날을 기다리지만, 현실은 그를 어두운 조직폭력배의 세계로 이끈다. 11일 개봉하는 영화 ‘화란’은 18살 소년 연규(홍사빈)의 이야기다.
학교폭력, 가정폭력에 이어 조폭의 세계까지 다루는 영화는 2시간 넘게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장면으로 가득하다. 말 그대로 ‘화란(禍亂: 재앙과 난리)’이다. 지난 5월 칸 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인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받았는데, 당시 ‘HOPELESS’(절망적인)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다. 그런데도 영화를 보고 나면, 연규가 그토록 가고자 했던 이상향인 ‘화란(和蘭)’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옥 같은 현실 속을 뒹구는 10대 소년에게 과연 희망이란 게 있을까. 영화 ‘화란’이 관객들에 계속해서 던지는 질문이다. '화란'을 통해 장편 영화에 등단한 김창훈 감독은 지난달 22일 언론배급 시사회에서 “폭력적인 환경이 한 소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했다. 누아르 영화보다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수도 없이 오디션 봤지만 '연규' 역 따고선 눈물”
연규를 연기한 배우 홍사빈은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을 앞둔 스물여섯살 신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감정부터 살아남기 위한 강렬한 눈빛까지, 불우한 10대 소년의 복잡한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단편 영화와 드라마 '방과 후 전쟁활동'(티빙), ‘무빙’(디즈니+) 등을 통해 모습을 비춘 적은 있지만, 그가 장편영화에서 주연을 꿰찬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앳되고 신선한 얼굴에 신인답지 않은 연기력이 더해져 순식간에 관객을 소년 연규의 삶 속으로 끌어들인다. '괴물 신인'이란 찬사를 받는 이유다.
지난달 25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연규라는 인물을 제가 잘 가꿔줄 수 있을 것 같은 알 수 없는 욕심에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20대 초반부터 수도 없이 오디션을 봐온 그는 연규 역할을 따기 위해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오디션에 임했고, 합격 소식을 듣고선 눈물을 흘렸다”고 돌이켰다.
어렵게 배역을 맡았지만, 홍사빈은 캐릭터 표현을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한다. 그는 “가정 폭력을 당해 나뭇가지에 눈 주위가 찢어지는 등 극한의 상황에서도 크게 표현하지 말자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화를 내거나 울어버리거나 직설적인 표현을 하면, 인물이 단순해지고 또 해석의 여지가 좁아져서 (관객들이) 다음 장면을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면서 “표현을 덜어낼수록 다음 장면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을 많이 남길 것이라 여겼기에, 저에겐 어려운 연기였다”고 설명했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를 참고하는 등 캐릭터 연구에 골몰했다고 했다. 그는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절절하고 안타까운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 좋은 연기라고 생각한다”며 “연규 캐릭터 역시 그렇게 나타내기 위해 그동안 찍었던 영상을 많이 보고, 거울 앞에서 여러 표정을 지어보는 등 저 자신에 대해 많이 연구했다”고 말했다.
송중기, 김종수, 정만식 등 선배 배우들은 그런 그를 믿고 기다려줬다고 한다. 홍사빈은 “저 같은 신인에게 그렇게 많은 테이크와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신 그 현장은 정말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특히, 조직의 중간보스 치건을 연기한 송중기에 대한 고마움이 컸다고 한다. 그는 “자기 소리를 못 내는 연규에게 치건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다. 송중기 선배 역시 현장에서 내게 그런 존재였다”고 말했다. “(송중기) 선배가 현장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이 ‘너 편한 대로 하라’는 것이었다”면서 “극 중 치건과 매운탕을 먹으며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마지막에 애드리브로 했던 ‘고맙습니다’라는 연규의 대사는 100%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뒷이야기를 전했다.
“정신 없이 보냈던 칸…꼭 다시 가고 싶어”
작품이 칸 영화제에 초청받으면서, 홍사빈은 첫 장편으로 데뷔 5년 만에 칸에 입성했다. 그는 “칸에 가고 싶다는 생각조차 감히 하지 못했었다. 당시 바짓단이 접힌 채로 레드카펫에 올라갈 정도로 정신이 없었고, 아직도 낯설다”고 말했다. “충분히 즐기지 못해서 나중에 꼭 다시 가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며 수줍게 웃었다.
칸에서 느꼈던 얼떨떨함을 털어놓던 그는 이내 연기에 대한 단호한 마음가짐을 드러냈다. “칸에 갔다는 사실 자체가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아닌 것 같다”면서 “신인 배우로서 운이 좋아서 감사한 타이틀과 기회가 주어졌지만, 절대로 안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사빈은 연기 뿐 아니라 연출에도 관심이 많다. 배우 문근영이 이끄는 ‘바치 창작집단’ 연출부에 몸담고 있고, 대학로에서 연극 연출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는 “원래 배우가 꿈이었지만, 큰 틀에서 창작자로서 활동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당장 11월 대학로에서 열릴 연극 ‘소공녀’를 준비하고, 졸업을 위한 기말고사를 잘 보는 것이 목표”라고 밝힌 그는 연기자로서의 포부를 묻자 담담하게 답했다.
“지금은 얼굴이 많이 알려지지 않아 혜택을 보는 면도 있지만, 나중에 작품 활동을 많이 한 뒤에도 매 역할에 어울리는, ‘그럴싸한’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어환희 기자 eo.hwanhee@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그 방, 배우 사진만 도배됐다…70대 영화광의 쓸쓸한 엔딩 | 중앙일보
- “K팝, 베트남에 밀릴 날 온다” 서울대 교수의 예언 | 중앙일보
- 안 그래도 ‘최순실’ 터졌는데…朴, 왜 논란의 지소미아 집착했나 [박근혜 회고록 3] | 중앙일보
- "택배기사요" 새벽 원룸 초인종 누른 40대, 벽돌 들고 있었다 | 중앙일보
- "끼지마" "미친짓"…이스라엘 지지 글 공유했다 욕먹은 미국 셀럽 | 중앙일보
- 임신·결혼 한꺼번에 알린 그룹 라붐 해인 "19세부터 만난 인연" | 중앙일보
- 지진도 못 느꼈는데 일본 곳곳 쓰나미..."이상한 일 일어나고 있다" | 중앙일보
- "한일전 야구 금메달" 황당 SNS글 올린 서영교, 뭇매 맞고 수정 | 중앙일보
- 86세도 데이팅앱 깔았다…"50세 이상만 가입" 중년들 몰린 곳 | 중앙일보
- 북한도 남침 땐 이 작전 쓴다…이스라엘 허 찌른 '로켓·게릴라전'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