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간판 즐비했던 서촌 세종마을, 영어간판 늘어났다. 왜?
한글날인 9일 오전 찾은 서울 경복궁역 인근 세종마을 초입에는 ‘파리바게뜨’, ‘이디야커피’ 등 한글 간판이 늘어서 있었다. 한복을 차려 입고 한글 간판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 외국인 관광객도 눈에 띄었다. 시민들에게는 경복궁 서쪽에 있어 시민들에게는 ‘서촌’(西村)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세종마을에선 2011년부터 간판 한글화가 본격화했다. 세종대왕이 탄생한 마을(통인동)이 있는 만큼, 이를 상품화해보자며 종로구청과 주민·상인들이 합심한 결과였다. 11년째 화장품을 팔고 있는 상인 연모(62)씨는 “초기엔 반발이 있었지만 취지도 좋고 비용도 지원해준다고 하니 흔쾌히 한글 간판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글 간판 일색이던 세종마을에서 영어 간판이 증가하고 있다. 경복궁역 2번 출구를 기점으로 자하문로와 맞닿아 있는 170m 길이의 거리에서 1층에 위치한 가게는 총 25개다. 이중 6개 점포가 ‘MEGA COFFEE’, ‘SALADY’ 등 영어 간판을 달았다. 2014년부터 ‘지에스25’라는 상호명을 유지해오던 한 편의점도 지난해부터는 ‘GS25’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세종마을 간판 한글화 작업이 마무리된 직후인 2014년 당시 같은 거리에서 영어 간판이 단 한 곳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영어 간판이 적지 않게 늘어난 것이다.
영어 간판이 늘어난 데 대한 시민 반응은 엇갈렸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대만 관광객 쑤 중(30)은 “영어를 사용하면 국제적인 느낌을 줄 수 있겠지만 한국만의 고유한 감성을 놓칠 수 있다. 이국적인 한글 간판이 많은 거리가 좋다”고 말했다. 반면에 직장인 조모(49)씨는 “개인적으로는 한글 간판을 선호하지만 기업과 점주 입장에선 예민한 문제 같다”며 “유명한 브랜드가 아닌 곳은 원래 상호로 쌓아온 이미지를 활용하고 싶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세종마을의 영어 간판 증가는 영어가 한층 익숙해진 인식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조기태 세종마을가꾸기회 회장은 “세종마을에 가게를 새로 여는 젊은 점주들은 한글보다 익숙한 영어를 더 선호하는 편”이라며 “강제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기 때문에 가게를 일일이 방문해 한글 간판을 사용을 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어 간판을 사용하는 고유 브랜드가 갈수록 늘어나는 점 역시 한글 간판에는 악재다. 영어로만 된 간판을 사용하는 한 프랜차이즈 점주는 “원래 프랜차이즈 이름이 영어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며 “간판 문제로 본사에 연락하기도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현행 옥외광고물법 시행령은 “광고물의 문자는 외국문자로 표시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해야 한다”고 규정하지만, 간판 제작의 자율성을 무시하긴 어려운 만큼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반면에 세종마을과 달리 도보로 15분 가량 떨어진 인사동 거리에선 대다수 가게가 한글 간판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종마을과 달리 2003년 서울시 조례에 따라 ‘역사문화지구’로 지정돼 지자체가 한글 간판 설치를 권유할 수 있기 때문이란 해석이 나온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한류 열풍으로 한글의 위상도 덩달아 높아진 현재 상황에서는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아낼 수 있는 한글 간판이 점주에게도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근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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