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조선어학회 한글수호 기념탑' 옆 친일파 시비

김종훈 2023. 10. 9.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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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공인 친일파 주요한 시비, 1993년 이래 친일행적 기록 없이 버젓이 자리

[김종훈 기자]

 세종로공원에 자리한 국가공인 친일파 주요한 시비. 바로 옆에 조선어학회한글수호기념탑이 자리해 있다.
ⓒ 김종훈
 
9일 오전 10시, 역사강사 박지혜(45)씨는 서울 광화문 세종로공원에 자리한 '조선어학회 한글수호 기념탑' 앞에 섰다. 한글날 577돌을 맞아 한글의 유래와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 초등학생 제자들과 함께 역사탐방을 온 것. 그는 이날 오전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살핀 뒤 인근에 자리한 기념탑을 찾았다.

"킹받는다, 어쩔티비, 저쩔티비, 안물안궁, 개맛있어 등이 요즘 학생들이 일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에요. 한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었던 분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미안한 일이죠. 고운 우리말부터 제대로 알자는 의미로 한글날인 오늘 시간 내서 왔습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기념탑 앞에 새겨진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투쟁기'를 자세히 읽어 내려갔다. 
 
"조선어학회는 일제 식민 통치 시대 한글학회의 이름이다. 나라의 운세가 막다른 고비에 이르자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것만이 겨레를 지키고 끝내 독립을 쟁취하는 유일한 길임을 굳게 믿고 1908년 한힌샘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이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였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고 '한글날'(1926)을 제정하고 동인지 <한글>(1927)을 간행하면서 국어 연구와 한글 보급 운동을 힘차게 펼쳐나갔다.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다시 바꾸고 이를 바탕으로 1942년 <조선말 큰사전> 출판에 착수하였다. 일제는 주동 인물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금하고 더할 수 없이 모진 고문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날 현장에서 역사강사 박씨도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한글날을 제정하고 일제강점기 우리 한글을 지키고 전승한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탑 바로 옆에 국가공인 친일파 주요한을 기리는 시비가 자리했다는 사실이다. 
시비 어디에도 남지 않은 친일기록
   
 국가공인 친일파 주요한
ⓒ 자료사진
   
주요한은 노무현 정권 당시 발족해 이명박 정권까지 이어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인반민족행위자로 선정해 발표한 인물이다. 

위원회가 밝힌 주된 이유는 매우 구체적이고 방대하다. 주요한이 일제를 위해 징병·지원병·학병 선전 활동을 했고, 선동 연설을 했으며, 임시특별지원병 경성익찬위원회 실행위원이자 국민동원총진회 발기인, 상무이사로 활동했고, 친일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 이사이자 시부회장, 평의원으로도 활동했다는 것. 무엇보다 1940년대 일제의 침략전쟁이 본격화되자 주요한은 대동아공영권과 침략전쟁 찬양, 침략전쟁 지원, 국민훈련후원회 일본어 보급운동을 전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주요한의 시비 어디에도 기재돼 있지 않다. 시비 뒤편에 새겨진 약력에는 주요한이 1900년 평양에서 태어났고,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포기하고 중국 상해로 탈출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을 편집했으며,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편집국장을 맡았고, 흥사단 활동을 하며 수양동우회사건으로 1937년 투옥됐다는 기록만 새겨졌다.

해방 후에는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반독재 투쟁을 했고, 1958년 정계에 투신해 4, 5, 6대 국회의원과 제2공화국 부흥부 장관과 상공부 장관,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했다고 강조됐다.

'일본어 보급'에 앞장선 한글을 사랑했던 시인
   
 세종로공원 주요한 시비
ⓒ 김종훈
   
조선어학회 한글수호 기념탑' 옆에 자리한 주요한 시비에는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라고 시작되는 1923년 주요한이 쓴 <빗소리>가 새겨졌다.

스물셋에 청년이었던 주요한이 중국에서 활동하며 한자어를 배제하고 순수한 우리말의 율감을 살려 밝고 서정적으로 빗소리에 의탁해 조국 해방의 꿈을 표현했다고 평가받는 시다.

그러나 한글을 사랑하고 조국 해방을 꿈꿨던 청년의 모습은 십여 년 뒤 수양동우회사건을 거치며 바뀐다. 종로경찰서에 검거된 뒤 그는 전향을 선언했고 조선신궁 참배를 시작으로 누구보다 적극적인 친일 인사로 변모한다.

구체적으로 1938년 12월 열린 시국유지원탁회의에서 주요한은 "이 비상시에 있어서는 우리는 일본이 승리를 얻어야 하겠다는 입장에서 황군의 필승을 위한 총후의 적성에 전력을 바쳐야 한다"라고 말했다. 바로 이어 일제에 국방헌금 4000원을 헌납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즈음 서울 중급 한옥 1칸이 980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1940년대 들어 주요한은 국민훈련후원회 등 친일단체에 발을 담그며 본격적으로 일본어보급운동에도 참여한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41년 8월에는 전쟁협력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 결성식에 참여해 준비위원으로 선출됐다. 이후엔 공개장소에서 "무적황군의 일분자가 됨을 욕되게 아니하려면 국체에 철저하고, 충절을 다하며, 사생을 초월하고, 곤고(困苦)를 견디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주요한은 1944년경 친일파 박흥식이 이끄는 주식회사 화신이 안양에 비행기 공장을 짓는 데 관여해 해방될 때까지 이 공장의 운영을 책임진 것으로 알려졌다. 문학과 언론뿐 아니라 군수분야에서도 일제의 침략에 직접 기여코자 한 것이다. 

하지만 광복 후 우리 사회는 주요한이 1979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그의 친일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못했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창립된 후 친일반민족행위자 박흥식, 이광수, 최린, 최남선, 노덕술 등과 함께 반민특위 특경대에 체포됐지만 이승만 정권의 노골적인 방해 공작으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났다. 

주요한은 오히려 사망 직후인 1979년 12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1993년에는 급기야 서울시가 직접 관리하는 세종로공원 중앙에 주요한의 '빗소리가' 새겨진 시비가 설치됐다. 시비 하단엔 "그가 평생 지낸 당주동과 사직동에 접한 세종로공원에 유족 최OO 여사, 4남 4녀와 그를 따르던 이들이 뜻을 모아 14주기에 맞춰 시비를 세웠다"라고 적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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