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조용해졌다"던 9월말 美의 설레발…워싱턴 착각 드러났다
미국 정부는 이스라엘 피습 이틀째인 8일(현지시간) 세계 최대 규모 항공모함을 기함으로 한 항모전단을 전진 배치하는 등 신속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신(新)중동전’의 확전 가능성까지 제기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흐르면서 미 정부의 상황 오판론 등 비판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전날에 이어 이날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통화하고 이스라엘 지원 방안을 포함한 사태 대응책을 논의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이날 오전 국가안보팀으로부터 이스라엘 상황을 브리핑받고 전례 없는 테러 공격을 당한 이스라엘을 위한 추가 지원을 지시했다고 백악관이 전했다.
미 국방부는 ‘행동’에 나섰다.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은 우선 제럴드 포드 항모전단의 동지중해 이동을 명령했다. 2017년 취역한 최신식 핵추진 항공모함으로 137억 달러(약 16조4373억 원)의 건조 비용이 든 제럴드 포드함은 전장 332m에 선폭 41m(비행갑판 78m)에 최대 76대의 전투기·헬기를 수용할 수 있다. MK57 수직발사 시스템을 비롯해 최신형 레이더 및 전자전 시스템을 갖췄고 최신형 A1B 원자로 2기를 통해 동력을 20년간 공급받을 수 있어 ‘슈퍼 핵 항모’로 불린다. 이 항모전단은 제럴드 포드함에 순양함인 노르망디함, 구축함인 토마스 허드너함, 매미지함, 카니함, 루스벨트함 등으로 구성돼 있다. 오스틴 장관은 “포드함과 5000명의 승조원, 순양함ㆍ구축함 등이 동부 지중해로 이동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아이언돔 요격무기 등 요청”
미 국방부는 또 이 지역에 F-35, F-15, F-16, A-10 등 전투기 편대를 증강 배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AP 통신은 항모전단 전진 배치와 전투기 추가 배치를 두고 “(이스라엘을 공격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에 유입되는 무기를 차단하고 활동 감시를 하기 위한 무력시위”라고 분석했다.
탄약 등 이스라엘에 대한 첫 안보 지원 물자는 이날 출발해 수일 내 도착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포스트(WP)는 이스라엘이 미국에 아이언돔 요격무기, 소형 폭탄, 기관총 탄약, 레바논 남부 군사활동 정보 공유 등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이날 CNN, NBC 등과의 인터뷰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지시는 이스라엘이 하마스 공격 대응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도록 확실히 해두라는 것”이라며 미 정부가 이스라엘 추가 지원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스라엘이 우리에게 어떤 구체적인 추가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와 관련해 CNN은 이스라엘 군 관계자와 미 국방부 관계자를 인용해 “이스라엘이 미국에 아이언돔에 사용할 정밀유도폭탄과 요격기를 추가로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블링컨 장관은 방송 인터뷰에서 ‘하마스 공격 목적이 미국이 꾀한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 관계 정상화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냐’는 질문에 “하마스, 헤즈볼라, 이란은 (이스라엘ㆍ사우디) 관계 정상화를 반대한다”며 “이스라엘과 사우디 등 다른 국가의 수교 노력을 막는 게 공격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 배후설에 대해선 “이란이 오랫동안 하마스를 지원해 왔다”고 답하면서도 이란이 이번 공격을 지시했거나 배후에 있다는 증거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백악관, 중동 성가신 분쟁 멀리해와”
바이든 행정부의 전폭적 지원에도 그간 대외 정책의 초점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전략적 경쟁 대상인 중국 견제 등에 집중한 나머지 하마스 공격 징후 등 중동의 숨은 뇌관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WP는 이날 “백악관이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중동의 성가신 분쟁을 멀리 하면서 예측하지 못했던 위기와 씨름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의 외교안보 사령탑인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9월 말 한 행사에서 “적어도 현 시점에서 중동은 지난 20년 동안보다 오늘날 더 조용해졌다”고 말했다. 이란의 핵무기 프로그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긴장 등 도전과제는 남아 있지만 9ㆍ11 테러 이전과 비교했을 때 오늘날 중동의 위기와 분쟁에 자신이 할애해야 하는 시간은 전임자들보다 현저히 줄었다고도 했다. 미 시사지 애틀랜틱은 “설리번의 발언은 바이든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 이번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인식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방증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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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사우디 정상화 노력? 쇼에 불과”
WP 역시 “이스라엘이 처한 위기는 워싱턴이 착각에 빠졌음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대규모 무력 충돌 사태가 벌어지며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관계 정상화 노력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이다. 미국의 중동 연구 기관인 미·중동프로젝트의 대니얼 레비 대표는 “현재 분명한 건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관계 정상화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낱 쇼에 불과하다는 것”이라고 WP에 말했다.
촌각을 다투는 이스라엘에 대한 각종 지원이 하원의장 공백으로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케빈 매카시 전 하원의장이 지난 3일 같은 공화당에서 반기를 든 일부 강경파에 의해 해임되면서 현재 하원은 패트릭 맥헨리 임시의장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맥헨리 임시의장 권한은 후임 하원의장 선출 절차와 관련된 권한만 행사활 수 있어 예산 등 이스라엘 지원을 위한 의안 처리에는 제약이 있다고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가 보도했다. 한 정치 전문가는 “맥헨리 임시의장은 하마스 규탄 결의안조차 통과시킬 수 없다”고 NBC 뉴스에 말했다.
한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8일 오후 긴급 비공식 협의를 소집해 하마스의 공격으로 촉발된 중동 무력 충돌 사태 등을 논의했다. 비공식 협의는 안보리 상임 이사국 5개국과 비상임 이사국 10개국 등 총 15개국이 참여하는데, 한국은 내년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 진출을 앞두고 있어 옵서버 자격으로 이날 비공식 협의에 참석했다. 다만 이날 비공식 협의 후에도 유엔 안보리 차원의 별다른 조치는 나오지 않았다고 CNN이 보도했다.
워싱턴=김형구 특파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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