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목숨 걸고 우리 말과 글을 지킨 사람들

임재근 2023. 10. 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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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조선어학회 사건 33명 중 10명이 대전현충원에 안장

[임재근 기자]

 해방 후 다시 모인 조선어학회 구성원들. 1945년 11월 13일에 촬영된 사진에서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병기, 네 번째부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한 명 건너 정태진, 가장 오른쪽이 김윤경이다.
ⓒ 한글학회
   
"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한테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다."

1942년 10월 1일에 시작된 '조선어학회 사건'은 위와 같은 어느 조선 여학생의 일기장에 적힌 한 줄의 문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일기장의 주인은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희. 당시 '국어'는 '일본어'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일제는 1938년 3월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에 즈음하여 조선어 교육 폐지에 착수했습니다. 이후 학교에서는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고,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황국신민서사'를 발표한 것도 이 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국어(일본어)'를 썼다고 야단친 교사가 있었다니... 경찰은 박영희를 비롯해 일기장에 자주 등장하는 동급생들까지 홍원경찰서로 연행해 일어 사용을 못하게 한 자들의 이름을 대라며 이들을 취조하고 고문했습니다. 극심한 고문 끝에 이들은 교사 정태진, 김학준, 최복녀의 이름을 대고 말았습니다.

경찰은 현직에 있어 도주의 우려가 적은 김학준과 최복녀의 신문은 뒤로 미루고, 학교를 그만둔 정태진에게 먼저 출두명령서를 발부했습니다. 정태진은 11년간 근무했던 영생고등여학교를 1940년 5월에 떠나 서울로 가서 조선어학회 사전편찬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1942년 9월 5일에 홍원경찰서로 연행되어온 정태진은 20여 일 간 계속된 고문으로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단체라고 허위자백하고 말았습니다.

일련의 사건들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비화되어 10월 1일에 이극로·이중화·장지영·최현배·한징·이윤재·이희승·정인승·권승욱·이석린 등 11명의 조선어학회 간부의 검거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43년 3월까지 이우식, 김법린 등 전국 각지에 있던 조선어학회 회원 및 사전편찬 후원회원들까지 총 33명에게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동안 작업해놓은 원고들도 압수당해 사전 편찬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왼쪽부터 조선어학회가 간행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1941)
ⓒ 한글학회
 
홍원경찰서는 이들을 1943년 3월 중순 검사국에 송치했고,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은 1943년 9월 12일에 33명 중 병으로 누워있어 잡아오지도 못했던 권덕규, 안호상을 비롯해 불구속 상태에 있던 신윤국, 김종철과 불기소 처분을 받은 안재홍을 제외한 28명을 함흥형무소 구치소로 이감시켰습니다. 이감 다음날부터 피의자들은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심문을 받기 시작했고, 김윤경, 정인섭, 이병기 등 12명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9월 18일 석방되었습니다.
나머지 16명은 1943년 겨울 유례없이 찾아온 한파를 견뎌야 했는데, 결국 모진 고문과 혹한으로 인해 이윤재가 그해 12월 8일 옥사하고, 이듬해인 1944년 2월 22일에 한징도 옥사했습니다. 1944년 9월 30일에 열린 예심공판에서 장지영과 정열모가 면소 처분을 받아 석방되고 12명이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표준말 사정 제1독회를 마치고 나서 현충사를 참배한 위원들의 기념사진. 이중에 옥사한 한징과 이윤재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1935.01.06.)
ⓒ 한글학회
 
재판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이 있은 후 2년여 만인 1944년 11월 말경부터 함흥지방법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라는 함흥지방법원의 예심종결 결정문에 따라 '치안유지법'의 내란죄가 적용되어 1945년 1월 18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이극로에게 징역 6년, 최현배에게 징역 4년, 이희승에게 징역 3년 6개월, 정인승과 정태진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습니다.
김법린·이중화·이우식·김양수·김도연·이인에게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고, 장현식은 무죄를 선고해 7명은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5명 중 정태진은 복역을 마치는 것이 오히려 상고보다 빠를 것이라 생각해 상고를 포기하고 7월 1일 출옥했습니다.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4명은 판결에 불복해 바로 상고했으나 8월 13일자로 기각되었습니다. 이들은 이틀 뒤인 8월 15일에 일제가 패망하면서 8월 17일에 풀려났지만, 실질적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룬 것이었습니다.
  
 대전현충원 제4묘역 144번의 애국지사 최현배의 묘. 최현배 지사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 해방이 되어 1945년 8월 17일에 풀려났다.
ⓒ 임재근
 
일제는 조선 땅을 강점했을 뿐 아니라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조선인들에게 일본어를 쓰도록 강제했고, 일본 정신을 갖도록 강요했습니다. 조선의 한글학자들은 비록 나라를 빼앗겼지만 민족의 정신을 담은 우리말을 지켜야만 빼앗긴 나라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독립 투쟁이었습니다.

2020년에 <나라말이 사라진 날>을 펴낸 방송인 출신 역사학자 정재환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도 책의 서문에 "독립운동 하면 만세시위나 임시정부 등을 떠올리지만, 민족어를 지키고자 했던 노력 또한 독립운동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되짚는 일은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과 마주하는 경험이자, 우리 말글이 만들어지고 성장해온 과정을 목격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한글학자들은 조선어 사전 편찬을 위해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1933년 10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하고, 1936년에는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완성하여 발표했습니다. 1941년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까지 간행하면서 조선어 사전 편찬 작업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 발생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상당수 조선어학회 구성원이 투옥되고 모진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윤재와 한징, 2명이 옥사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독립 투쟁이었습니다.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자 10인의 묘. 위쪽 왼편부터 신현모(신윤국)(독립유공자1-173), 한징(독립유공자1-397), 이윤재(독립유공자1-1-499), 이석린(독립유공자2-0775), 이강래(독립유공자2-0926), 서민호(독립유공자3-093), 정인승(독립유공자3-359), 최현배(독립유공자4-144), 이인(독립유공자4-566), 김양수(독립유공자7-147).
ⓒ 임재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를 당한 33명 중 10명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옥사했던 이윤재 선생과 한징 선생은 1962년에 독립장을 추서받았고,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1묘역 499번과 독립유공자 제1묘역 397번에 각각 안장되어 있습니다. 1990년 애국장을 추서받은 신윤국(신현모) 선생도 독립유공자 제1묘역 173번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독립유공자 제2묘역에는 이석린(775번), 이강래(926번) 선생이,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는 서민호(93번), 정인승(359번) 선생이 잠들어 계십니다. 제4묘역에는 최현배(144번), 이인(566번)이 모셔져 있고, 제7묘역 147번에는 김양수 선생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선생들은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나 고향 등 국립묘지 밖에 안장되거나 묘소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부는 해방 후 월북 또는 납북되어 북녘에 묻혀 있습니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일제강점기 한글 학자들이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편찬하려 했던 조선어 사전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완성시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라진 줄 알았던 원고가 해방 후 서울역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1947년 10월 9일 제1권을 발행한 것을 시작으로, 2권은 1949년 5월 5일, 3권은 1950년 6월 1일, 4권은 1957년 8월 30일, 5권은 1957년 6월 30일, 6권은 1957년 10월 9일에 발행해 <우리말 큰 사전>은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가 조직된 지 28년 만에 6권으로 완간되었습니다.
  
  조선어 큰 사전 편찬원고
ⓒ 국가기록원
     
 조선어학회 회장 장지영이 새 사전을 학무국장 오천석과 을유문화사 사장 민병도, 학무국 고문 깁슨(Robert E. Gibson)에게 보여주는 모습.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말모이>에 이런 극적 장면이 담겨 있으니 한글날을 맞아 영화 <말모이>를 감상해보거나, 대전현충원을 찾아 목숨을 걸고 우리 말과 글을 지키려했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묘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한편, 조선어학회는 한글 연구를 위해 주시경 선생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 모여 만든 학술모임 '국어연구학회'로 1908년에 시작했습니다. 1919년 가을에 '조선어연구회'로 이름을 고쳤다가 1931년 1월 10일부터 '조선어학회'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1949년 10월 2일에는 '한글학회'로 이름을 고처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정재환, 『나라말이 사라진 날』, 생각정원, 2020. 한글학회, 『한글학회 100년사』, 한글학회, 2009.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http://archive.history.go.kr/) 박광종, 「조선어학회사건과 조선인 형사들」, 『민족사랑』, 2017년 3월호. (https://www.minjok.or.kr/archives/87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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