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로 만들었는데 '기부 명소'…믿음이 낳은 '2억어치 사랑'
김윤호 2023. 10. 9. 13:00
지난 5일 울산시 남구 선암호수공원. 언덕을 따라 100m쯤 올라가자 등산복을 입은 50대 주부가 한 평(3.3㎡) 남짓한 사찰 '안민사' 앞에서 두손을 모으고 빌고 있었다. 그러더니 성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사찰 문을 열고 불전함에 돈을 넣었다. 그는 "수학능력고사를 앞둔 자녀를 위해 기도했다"고 말했다.
안민사는 높이 1.8m, 너비 1.2~1.4m 크기로 장난감 같은 시설이다. 하지만 울산시불교종단연합회 인증을 받은 정식 사찰이다. 안민사와 10여m 간격을 두고 비슷한 크기의 '호수교회'와 천주교 시설 '성베드로 기도방'이 있다. 이들 시설도 정식 종교시설로 등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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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줏돈, 헌금 등 2억2513만원 기부
국내에서 가장 작은 초미니 '사찰·교회·성당'이 '기부 명소'로 자리 잡았다. 울산 남구는 1~2주에 한 번꼴로 종교시설 안에 설치한 불전함·헌금함 등에서 수거한 성금을 울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보낸다. 한번 수거할 때마다 이들 불전함 등에는 총 100만원 정도 모인다. 이렇게 10년 이상 기부해 왔다.
울산 남구 초미니 종교시설 담당은 "안민사와 호수교회를 더해 올해 8월(2011년 말부터)까지 2억2513만원을 기부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한 해 평균 안민사 불전함에선 적게는 900만원 많게는 2300만원, 호수교회 헌금함에선 40만원에서 280만원까지 기부금이 나오는데, 이달부터 연말까진 금액이 더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남구 측은 이들 종교시설에서 거둔 시줏돈 등은 계속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쓸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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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 낸 수험생 손자 둔 할머니
이들 초미니 종교시설은 원래 기부 명소가 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단순 '볼거리용'으로 설치했기 때문이다. 울산 남구는 2011년 9월 6억원 정도를 들여 이들 시설을 만들었다. 사찰 내 불당에는 불상·목탁 등을 갖추고, 교회 내부엔 십자가·성경 등을 완비했다. 성당 안에도 마리아상을 비치했다. 처음엔 공원을 거닐던 이용객이 신기하다며 한 번씩 들여다보거나 사진을 찍는 정도였다. 기부 위한 불전함이나 헌금함이 따로 없었다. 그러다 종교시설에 적지 않은 사람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쓰라며 시줏돈과 헌금을 내고 가기 시작했다.
한 수험생 손자를 둔 할머니가 5만원과 편지를 담은 흰색 봉투를 안민사에 두고 간 게 기부의 시발이 됐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이곳에서 공양을 한 뒤 손자가 좋은 성적으로 울산과학고에 입학하게 돼 감사하다'고 편지에 썼다. 불우이웃을 돕겠다며 유치원 아이들이 낸 동전부터 공원을 둘러보다 1000원, 2000원을 놓고 가는 시민이 줄을 이었다. 쌀·떡·과일·사탕·에너지 음료 등 돈 대신 음식을 놓고 가는 사람도 있다. 남구는 기부금을 지키기 위해 폐쇄회로(CC)TV 7대를 설치해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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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록원 인증받은 초미니 종교시설
이들 초미니 종교시설은 '국내에서 가장 작은 종교시설'로 한국 기록원에서 인증(2012년)을 받았다. 또 특허청 디자인 특허(2013년)를 취득했다. 이색 사진 촬영지로 인기다. 관람객 수치를 확인하던 한국 기록원 인증 초기엔 주말 2만여명이 구경 올 정도였다고 남구 측은 전했다. 남구 관계자는 "기네스북에도 도전하려 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교회로 알려진 캐나다 ‘리빙사이드채펄’보다 1.3㎡ 넓어 실패했다"고 전했다.
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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