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너무 길다" 로마 길거리 전전하는 세 청춘 이야기
[조영준 기자]
▲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끝없는 일요일> 스틸컷 |
ⓒ 부산국제영화제 |
01.
영화가 시작되기 전, 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 상태. 초조하고 불안하고 슬픔으로 가득 찬 그 말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영화가 끝나고 난 후에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알렉스, 19살 소년이다. 그의 목소리는 미래에 기대어 살아가고자 했던 사람이 그 종착지가 무너지고 난 후에 얼마나 비극적일 수 있는지 암시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 목소리의 발원을 그려내기 위해 세 명의 십 대 청소년을 스크린 앞에 내세운다. 브렌다와 케빈, 그리고 알렉스다.
알랭 파로디 감독의 첫 장편 영화 <끝없는 일요일>은 로마 외곽 빈민가 출신의 세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로마 길거리를 전전하며 인생을 허비하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청춘에만 기대어 살아갈 수 있는 삶을 꿈꾸는 것 같기도 하다. 영원할 것만 같은 인생과 우정, 그리고 사랑이다. 다만 기대와 달리 모두에게는 끝이 존재한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어떤 일요일의 찬란한 순간도 곧 석양을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자리 위에서 얼마나 더 버텨낼 수 있는가 하는 것만이 중요한 문제다. 영화는 그런 청춘의 표상을 가슴 아프게 그려낸다.
02.
"무슨 놈의 하루가 이렇게 길어. 인생이 너무 길다."
영화는 브렌다가 알렉스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표면에 드러내면서 세 사람의 공고했던 균형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영원할 것만 같던 우정에도, 태워지지 않을 것 같던 10대의 날들에도 조금씩 균열이 일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사건이 세 사람의 내일을 크게 바꿔 놓게 될 것이라고 처음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시작에서 등장하는 이들의 모습 전부에서 그 어떤 진지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세 사람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사치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자유와 고요다.
가장 먼저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브렌다다. 신체의 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이제 시작되는 변화는 마음에도 파고를 일으킨다. 그 불안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세와 태도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은 다음의 문제다. 알렉스로부터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지금의 방탕한 생활을 멈추겠다는 약속도 받아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 이 문제는 브렌다뿐만이 아닌, 나머지 두 사람까지 포함한 이들 모두의 문제가 되어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야기를 뒤흔드는 근거가 된다.
▲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끝없는 일요일> 스틸컷 |
ⓒ 부산국제영화제 |
이 작품의 뼈대는 고전적인 내러티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우정과 사랑, 삼각관계, 우정의 배신, 흔들리는 미래 등의 설정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시청각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미학적이고 추상적인 쪽에 가깝다. 의도적으로 절제한 대사와 연기보다는 이미지에 집중하는 시각화 형식. 심지어 영화 속에서 두세 차례 등장하는 정지된 순간의 영상화, 여러 스틸컷을 이어 붙여 완성한 영상은 이 작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영화의 중반부에서 등장하는 브렌다와 케빈의 키스신은 로마 곳곳에서 이어지는 수십 차례의 키스 장면(스틸컷)을 이어 완성되었다. 이 영상은 그 행위의 순간이 마치 정지된 것 같은, 그 정지된 시공간 속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영원히 박제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물론 브렌다의 곁에 머물고 있는 대상이 알렉스가 아닌 케빈이라는 사실은 이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했던 균열의 시작을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키워내는 사건이 된다.
알랭 파로디 감독은 이와 같은 영상화 작업, 시도에 대해 우리 세대가 갖고 있는 언어적 접근과 변화, 그리고 문제를 담고자 했다고 말한다. 직접적인 소통보다는 사진을 통해 뜻과 의미를 전달하고 시청각적 콘텐츠를 누구나 끊임없이 생산해 낼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을 담아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대사를 절제한 부분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이 서술적 응축은 아직 채 영글지 못한 세 인물의 감정적 격동을 미적인 방식으로 구현해내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04.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알렉스가 도메니코의 일을 도우러 다니는 사이 홀로 남겨진 브렌다와 케빈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처음의 관계, 세 사람이 연결되어 있던 순간으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알렉스의 이탈은 남은 두 사람의 키스 장면을 완성시키는 시작점이 되고 만 셈이다. 이미 관객들은 이 관계의 종말을 예감하게 되지만 의뭉스럽게도 영화는 아직 이 불안한 동행을 멈출 생각이 없다.
▲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끝없는 일요일> 스틸컷 |
ⓒ 부산국제영화제 |
브렌다의 임신과 알렉스의 마지막 모습, 그리고 케빈이 불법적으로 도시 곳곳에 남기는 사인 행위는 모두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이들의 터질 듯한 반항, 뜨거운 젊음의 표상을 의미한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출산이 임박한 브렌다가 케빈과 함께 병원으로 향하다 교통 정체에 막히게 되자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 놓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자 이제 겨우 16살 밖에 되지 않았다며 케빈이 울부짖는다. 그동안 자신들이 남긴 흔적과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고통과 슬픔 앞에 쉽게 무너지는 어린 존재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이제 막 서른이 지나는, 이 작품으로 첫 장편 영화를 시작하게 된 알랭 파로니 감독과 <끝없는 일요일>에 베니스영화제가 오리종티 심사위원특별상을 안겨준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독창적인 표현 방식과 시대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극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유의미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 이는 어쩌면 앞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감독의 첫걸음인지도 모른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