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 추락의 시대, 말 모으던 어른들을 생각한다
[김성호 기자]
국어에 대해 흔히 주어지는 편견이 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와 현재를 아주 자연스런 무엇으로 여기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쓰는 말과 글, 또 지난 수십 년간 이어진 그 변천은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어서, 한글이 창제된 이래 지금까지도 그와 같이 자연스러운 변화를 겪었으리라 여기고는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누리는 말과 글의 지난 역사는 결코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불과 백수십 년 전 동아시아 제일가는 제국을 지배한 말갈과 여진족은 오늘날 독자적인 국가는커녕 제 문화조차 산산이 흩어버리고 소멸 직전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또 수세기 전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공포에 떨게 한 몽골족은 통일된 언어를 수립하지 못한 채 기초적인 수준의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 공용어인 몽골어 외에 중국어나 카자흐어, 러시아어를 쓰는 이가 많고 문자 또한 슬라브계 키릴문자를 사용하는 게 보통이다.
▲ 말모이 포스터 |
ⓒ 롯데엔터테인먼트 |
오늘의 한국어, 결코 당연하지 않다
<말모이>는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글이 누군가의 공로에 크게 빚지고 있음을 알게 하는 영화다. 한글날의 원조 격인 가갸날을 제정한 조선어연구회, 나아가 그 후신인 조선어학회가 영화의 주인공이라 해도 좋겠다.
조선어학회는 1931년 조선어연구회의 이름을 바꿔단 단체로, 20세기 초 국어연구학회에서 출발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수차례 이름과 형태를 바꾸었다가 오늘날 한글학회로 이어진 단체라 하겠다. 1931년부터 독립 이후까지 조선어학회란 이름 아래 활동했으며, 1942년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맞서 항거하다 33명이 체포되고 2명이 고문 끝에 사망한 조선어학회 사건을 겪었다. 영화는 바로 이 사건을 다룬다.
▲ 말모이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그들이 언어를 모으려 한 이유
정환(윤계상 분)은 조선어학회의 젊은 대표다.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 뜻 맞는 동지들과 함께 단체를 이끄는 그는 갈수록 목줄을 조여 오는 일제의 탄압에 고뇌를 거듭한다. 조선말과 글이 설 여지가 갈수록 사라지는 위기 가운데 조선어학회는 사전을 편찬하기로 결의한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벌써 10년이 된다.
TV도 인터넷도 없는 시절, 전국 팔도의 말과 글은 그 형태며 쓰임이 몹시 달랐고 서로 다른 사투리로 존재하여 표준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찍이 주시경 선생 등 어학자들이 맞춤법 정비를 결의하긴 했으나 방대한 언어자원을 한데 모으지도 못했을 뿐더러 표준화 작업 또한 진척되지 못했다. 영화 속 정환과 동료들이 시도한 것이 바로 표준화 작업을 위한 언어자원 모으기, 즉 말모이 작업이다. 이로부터 국어사전 편찬에 이르는 것이 이들의 목표가 된다.
왜 언어인가. 총칼을 들고 조국을 찾겠다는 독립운동 초기의 방향은 한계에 부닥친 지 오래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영국, 미국, 러시아 등과 협정을 체결한 일제의 외교 및 군사력은 독립군을 압도한 것이 현실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독립운동과 민족 및 역사성의 보존은 장기적인 작업이 될 밖에 없었다. 일제의 식민지배 전략 또한 갈수록 교묘하고 치밀해져 민족문화를 말살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전술했듯 국어가 설 자리를 잃어가는 상황에서 이를 지키는 건 독립운동의 첫걸음이라 해도 좋았다.
▲ 말모이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말은 민족의 정신, 글은 민족의 생명
조선어학회를 이끄는 정환 앞에 판수(유해진 분)가 등장하며 영화는 속도를 올린다. 판수는 극장 기도로 일하다 실직한 인물로, 중학생인 아들의 학비가 밀려 있던 차에 정환의 가방을 훔치려다 그와 연을 맺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판수는 조선어학회의 잡일을 맡아보는 심부름꾼으로 고용된다. 그로부터 문명이었던 그가 조선어학회의 동지로 일익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 영화의 주된 얼개라 할 것이다.
영화는 민중을 대표하는 판수와 조국 독립을 위하는 지식을 대표하는 정환이 점점 서로를 이해하고 업에 기여하는 과정을 그린다. 일제의 탄압에 대항해 지식인과 민중이 힘을 모아 말모이 작업을 하고 사전을 만들기에 이르는 과정이 통속적으로 그려진다. 전형적인 캐릭터와 통속적인 전개에 누군가는 이 영화를 식상하다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영화가 다루는 바, 언어를 지키려 목숨을 거는 이들의 모습은 이제껏 영화에선 다뤄진 적 없는 낯선 모습이다. 총칼이나 폭탄을 들고 일본 병사며 일제 앞잡이를 해하는 독립운동가의 모습은 수없이 다뤄졌으나, 누구도 해할 수 없는 말모이 작업이며 사전편찬을 하겠다고 제 목숨을 거는 이의 모습은 기존의 영화가 주목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낯선 소재로 오늘의 현실 가운데 유효한 작업을 해냈다면 이 영화를 식상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일 테다.
▲ 말모이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문맹이 사라진 세상, 왜 문해력은 추락하는가
무엇보다 위협적인 현상은 사람들의 어휘력과 문해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독서량 급감과 지식에 대한 무시가 일상화된 오늘날엔 어휘력이며 문해력 저하를 큰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무식을 다름으로 치부하고, 상식의 모자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이들이 적잖은 상황에서 상용되는 한국어의 폭은 갈수록 줄어만 간다. 한 단어의 망실은 곧 하나의 세계가 사라짐이며, 사고가 닿을 수 있는 가지의 꺾임을 의미한다. 언어를 정신과 생명으로 여긴 선조들의 노력에도 제 정신과 생명의 축소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후손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현상을 어떻게 바람직하다 할 수 있을까.
<말모이>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까막눈이었고, 아는 것이 없었던 판수가 글을 배우고 더 넓은 말을 얻은 뒤 더 큰 세상으로 나와 제가 지킬 가치를 만나는 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언어가 그를 이제껏 마주한 적 없는 기쁨과 슬픔으로 이끌고, 그로부터 더 깊고 넓은 삶을 살 기회를 열어주었던 것이다.
어쩌면 각고의 어려움에도 조선어학회 활동을 이어간 선조들의 마음이 바로 여기에 닿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후세의 우리는 그들의 노력으로부터 단지 언어만이 아닌 생각과 감정, 사상과 꿈을 이어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많고 큰 것일 수도 있다.
한글날을 맞아 <말모이>를 보는 건 그래서 의미 깊은 일이다. 영화 한 편이 역사와 사상과 삶을 돌아보게 한다면, 그대로 좋은 영화인 게 아닐까. 여러 이름난 영화평론가들이 혹평을 마다하지 않은 이 영화에 나는 차마 그와 같은 평가를 내릴 수가 없다. 분명히 이 영화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귀한 생각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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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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