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의 Epi-Life] 밥 짓는 솜씨를 자랑할 절호의 기회
서지영 2023. 10. 9. 08:02
“눈으로 보았을 때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고 촉촉한 물기가 배어 있어야 한다. 냄새를 맡으면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나야 한다. 입안에 넣었을 때 밥알이 낱낱이 살아 있음이 느껴지고, 혀로 밥알을 감았을 때 침이 고이면서 단맛이 더해지며,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게 이빨 사이에서 기분 좋은 마찰을 일으켜야 한다.”
맛있는 밥에 대한 저의 기준입니다. 이 글은 졸저 ‘미각의 제국’(2010년, 따비)에 실려 있습니다. 음식물을 입에 넣었을 때에 제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관찰하고 이를 글로 옮겨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쓰고 난 다음에는 책 속의 문장들이 제 감각을 구속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밥상에 앉으면 저 문장이 저절로 떠올라서 제 앞에 놓인 밥을 자동으로 품평하게 됩니다.
밥은 밥상의 중심입니다. 반찬과 국은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기 위해 존재합니다. 밥이 맛없으면 밥상의 기타 음식은 맛있고 맛없음의 품평에서 멀어집니다. 밥집에서 밥이 맛없으면 다른 것이 아무리 맛있어도 빵점입니다.
‘미각의 제국’을 썼던 2010년에 비해 밥의 사정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쌀의 품종과 도정 날짜를 따지는 소비자를 자주 만납니다. 갓 지은 밥을 내려는 식당 주인의 노력도 봅니다. ‘미각의 제국’에 썼던 저 문장은 머지않아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일본에 유명한 밥 명인이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밥 명인은 부엌에서 밥만 합니다. 그는 좋은 쌀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좋은 쌀을 고르는 일은 싸전에 맡깁니다. 좋은 쌀을 고르는 것과 맛있는 밥을 짓는 것이 서로 다른 전문적인 영역의 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일본인 특유의 오다쿠적 정신 세계로까지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일입니다.
서울의 유명 냉면집은 수십 년 동안 한 정육점에서 쇠고기를 받고 있습니다. 서울의 유명 곰탕집도 수십 년 동안 그 정육점에서 쇠고기를 받고 있습니다. 곰탕집의 가족이 분가하여 식당을 차렸는데, 분가를 한 곰탕집도 그 정육점의 고기를 받는다는 사실을 제게 강조하였습니다. 냉면 조리장과 곰탕 조리장의 일이 다르고, 정육점 주인의 일이 다르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글쟁이입니다. 꽤 많은 책을 썼으며 지금도 집필 중인 책이 있습니다. 글쟁이도 다양합니다. 시인도 있고 소설가도 있고 수필가도 있고 영화평론가도 있고… 그 수많은 글쟁이 중에 저는 음식 전문 글쟁이입니다.
음식에 대한 글을 전문적으로 쓰니까 저를 요리사나 외식경영인과 같은 직업군에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게 요리법을 묻거나 식당 경영 노하우를 묻는 분들이 그런 분들인데, 영화평론가에게 카메라 세팅 방법을 묻거나 제작비 펀딩 노하우를 묻는 것과 유사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요리도 하시나요?” 강연 중에 이런 질문을 받을 때에는 제가 이런 말을 해드립니다. “여러분도 요리를 하지요? 저도 그 정도의 요리는 합니다. 다만 저는 요리사처럼 요리를 하지 않습니다. 요리사는 요리로 돈을 버는 숙련노동자입니다. 저는 글로 돈을 버는 숙련노동자이구요. 여러분은 요리사에게 ‘글도 쓰세요?’ 하고 질문하지 않지요? 마찬가지로 글쟁이에게 ‘요리도 하세요?’ 하고 질문하지 않는 게 정상입니다.”
맛있는 밥에 대해 글을 쓰려다가 방향이 약간 틀어진 듯합니다. 그렇다고 맥락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므로 그냥 내달립니다.
밥 명인은 여름에 접어들면서부터 햅쌀이 나오기까지 2개월 가량 문을 닫는답니다. 그 기간에는 아무리 믿음이 가는 싸전이라 하여도 밥을 맛있게 짓기에 적당한 쌀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햅쌀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햅쌀은 대충 밥을 지어도 맛있습니다. 재료가 극단적으로 좋으면 명인이 요리를 하나 일반인이 요리를 하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이 밥 짓는 솜씨를 자랑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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