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M 못 믿어, 사람하고만 거래"…이런 고객만 하루 160명 온다

오효정 2023. 10. 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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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우리은행 서울 강서구 화곡동시니어 플러스 출장소를 찾은 70대 여성 이모씨는 창구 직원으로부터 A4용지 수십장을 받아갔다. 지난 3년간 계좌 거래내역이었다. 모바일 앱에선 터치 몇 번으로 24시간 확인할 수 있는 게 거래 내역이지만 이씨에겐 먼 얘기다. 몇 년 전 ATM에서 출금한 현금을 깜빡하고 챙기지 않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한 뒤엔 ATM도 쓰지 않는다. 이씨는 “사람하고 거래하는 것만 믿음이 간다”고 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위치한 우리은행 시니어플러스 영업점 3호점. 점포에는 노년층을 위한 휴식공간(왼쪽)과 큰글씨 ATM(오른쪽)이 구비돼 있다. 오효정 기자

이날 오후 한 시간가량 시간이 흐르는 동안 출장소를 찾은 손님 20여명 중 90%는 노년층이었다. 연금이 잘 들어오고 있는지 확인하러, 또 공과금을 내러 청구서를 직접 챙겨 창구를 찾은 이들이었다. 로비 매니저(청원경찰)는 수시로 “공과금 내러 오신 분”을 연신 외쳤고, “창구 안 가도 수납기를 이용하면 된다”며 1:1 과외에 나섰다. 시니어 고객들을 위해 2~3배는 큰 글씨로 준비된 ATM 화면이 “평소와 달라 어색해서 못 쓰겠다”는 손님도 있어 ‘과외 수업’은 계속됐다. 한 70대 손님은 “최신 기계라고 해도 늙은이들은 쓰질 못한다”고 했다.

이곳 우리은행 영업점 간판은 2021년 12월 내려갔다가 지난 8월 다시 달렸다. 같은 자리에서 영업하던 화곡동 금융센터가 폐점했다가, 노년층 수요에 맞춰 ‘시니어 플러스 출장소’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 문을 연 것이다. 은행이 사라진 기간 노년층 손님들은 이곳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지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씨는 “아침 8시 반까지 가도 은행 앞에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번호표를 받아서 9시까지 복도에 앉아있었다”고 했다.

권유진 출장소장은 “요즘 열에 아홉은 ‘은행을 다시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해 찡할 때가 많다”며 “개점 첫날만 손님 210명이 몰린 이후 하루 평균 120~160명이 은행을 찾는다”고 했다. 노년층 특화 점포인 만큼 직원들의 손님 응대법도 조금씩 다르다. 큰소리로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고, 행동이 느린 손님에겐 재촉하는 대신 친근하게 말을 건다. 이날 출장소에도 직원들이 “엄마~ 아버님~”하는 소리가 자주 울렸다.

신재민 기자

9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은행 점포 수는 5807개로 10년 전 6499개에 비해 크게 줄었다. 비대면 거래가 늘어나 점포를 찾는 고객이 줄어든 영향이다. 그러나 노년층 등 점포가 필요한 수요층도 분명해 은행 입장에선 고민이다. 고령화로 노년층 순 자산이 늘어나는 추세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은 ‘놓쳐선 안 될 손님’이기도 하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비대면 거래가 확대되면서 점포 감소는 불가피한 흐름이긴 하지만, 대신 시니어 특화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이 최선의 방안”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노년층 수요가 많은 점포나 지역을 분석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했다.

신한은행은 6월부터 월 1회 버스 안에 은행을 차린다. 노인복지관 주차장에 버스를 세워놓고 ‘찾아가는 점포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데, 매월 노년층 100명 이상이 찾는다. 지난달 21일엔 인천 서구 연희노인문화센터를 찾은 70대 여성 유모씨는 “최근 인근 지점이 없어져 왕복 1시간 정도 걸려 은행을 가고 있다”며 “버스가 찾아와 가까이서 은행 일을 볼 수 있어서 편하다”고 했다. 60대 여성 A씨는 “지점이 없어지면 새 지점을 찾아야 하는데, 길을 잘 몰라 물어물어 겨우 찾아갔다”며 “한 달에 한 번은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문화센터 다목적실에선 디지털 금융교육도 이뤄졌다. 강사는 “자 이게 앱이라는 거예요, 앱이야~ 애비야~”, “스마트폰도 집에 가서 쉬어야 해요. 집 모양을 누르면 집에 가는 거예요” 하며 스마트폰 사용법부터 교육했다.

지난달 21일 인천 서구 연희노인문화센터를 찾은 신한은행 '찾아가는 이동점포' 버스(왼쪽)와 내부 모습(오른쪽). 오효정 기자

이 같은 시니어 특화 서비스를 경험한 노년층 손님들은 “대면 서비스가 필수”라는 것에 입을 모았다. 은행원이 화상으로 등장하는 ATM이 나오고 디지털 뱅킹 사용법이 쉬워진다 할지라도, “창구 직원을 직접 눈앞에서 만나지 않으면 어떤 거래를 해도 불안하다(70대 남성 B씨)”면서다.

한국보다 고령화를 먼저 겪은 일본에선 은행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리소나 그룹의 간사이 미라이 은행은 지난해 11월 쇼핑센터에 상담 특화형 점포를 열었다. 노년층뿐 아니라 금융상품 상담이 필요한 젊은 층도 함께 겨냥해, 저녁 7시까지 연중무휴로 영업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디지털화 이후 소비자가 요구하는 서비스와 질과 내용이 바뀌고 있다”며 “점포에는 대면 커뮤니케이션의 가치가 여전히 남아있다”고 짚었다.

오효정 기자 oh.hyo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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