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들 "고마워습니다"…범죄예방 한국어 교실 '폴샘'의 정체
한글날을 나흘 앞둔 지난 5일 오후 8시가 되자 5명의 외국인이 속속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 다문화안전경찰센터를 채웠다. 알제리, 러시아, 파키스탄, 네팔, 중국에서 온 5명의 시선은 일제히 강단에 선 채양선(55) 원곡다문화파출소 소속 순찰2팀장(경위)의 입을 향했다. 일명 ‘폴쌤의 범죄예방 한국어 교실’. 채 경위는 수강생들에게 ‘폴쌤(선생님)’으로 불린다. ‘폴리스’에서 한 글자 따온 이름이다.
안산시는 외국인 인구가 부동의 1위인 지방자치단체(8만9381명·2월 말 기준)다. 단원구에만 6만3782명의 외국인이 밀집 거주한다. 다문화안전경찰센터는 이 지역 내에서 외국인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다문화음식문화거리 초입에 있다. 폴쌤의 강의는 수강 등록도, 수업료도 필요 없다. 의자를 채워 넣고 창문에 달린 스크린을 내리면 강의실로 변신 끝. 수업시간은 1시간이다.
지난 4월 4일 시작해 이날 52강을 맞은 이 교실에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10명 안팎의 외국인 수강생이 꾸준히 자리를 채웠다. 연인원으로 8개국(중국, 러시아, 파키스탄, 스리랑카, 네팔, 알제리, 필리핀, 소말리아) 출신 280명이 수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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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사할린 한인 “뿌리 말 배우고 싶어”
이날 강의 시간에는 ‘정신질환 추정자 응급입원’ 제도 안내에 이어 세종학당(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교재를 이용한 본격 한국어 수업이 이어졌다. 채 팀장은 ‘입학, 졸업, 취직했을 때 하는 말’ ‘선물을 주고받거나 축하할 때 쓰는 말’ 등의 내용을 수강생들이 이해할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지난해 한국에 온 알제리 출신 공장 노동자 무스타프(35)씨는 “한국말도 어려운데 한국의 법과 규칙은 더 어렵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며 “여기서 공부하는 게 내겐 큰 기회다”라고 영어로 말했다.
맨 앞자리에 앉은 수강생 강빅토르(66)씨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부모가 사할린(Sahalín)으로 강제 이주를 당해 그곳에서 태어나 러시아인이 됐다. 환갑을 훌쩍 넘긴 2021년에야 부모님의 나라에 왔다. 강씨는 한국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내 뿌리는 원래 한국이고 나는 사할린 동포”라고 분명히 표현했다. 그러면서 “나는 한국에 꼭 와야 했다. 부모님이 쓰던 말(한글)을 쓰지도 못했다”며 “폴 선생님이 내가 한국말을 잘하지 못해도 천천히 몇 번이고 알려줘 고맙다. ‘고마워습니다’”라고 했다.
2011년 한국에 정착한 파키스탄인 칸 하심(33)씨는 지인인 네팔인 산타(46)씨와 나란히 앉았다. 초집중 모드였다. 하심씨는 “버스를 찾아 타거나 은행에 가서 일을 볼 때, 출입국사무소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한국말을 잘 못해서 너무 어려웠다”며 “한국에 12년 전에 와서 한국말을 가르쳐주는 학교에 많이 가봤는데, 너무 빨리빨리 가르쳐 따라가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산타씨도 “여기 오기 전까지 처음엔 한국말 한 마디도 못했다”며 “경찰관이 한국말을 가르쳐준다는 전단을 보고 왔는데, 벌써 6개월이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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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학구파, “자격증 따 전문성 높일 것”
채 경위는 “‘코리안 드림’을 찾아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당장 버스나 택시에 지갑이나 가방을 놓고 내려 분실물이 생겨도 간단한 의사 표현조차 못해 어려움을 겪는 일이 빈번하다”며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 시작한 일”이라고 말했다.
채 경위는 단원서 내에서 소문난 학구파다. 입직 이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2005~2009년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토대로 경찰청 인터폴계에서 근무했고, 경찰대 공공안전학 석사 학위도 취득했다. 그런 그는 지난해 사이버한국외대 한국어학부 3학년으로 편입해 또 한번의 도전을 하고 있다. 전문 한국어강사 자격증을 취득해 외국인들에게 보다 더 전문성 있는 강의를 제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다.
지난 2월 발령으로 원곡다문화파출소에 벌써 3번째, 5년차 근무라는 채 팀장은 “외국인도 관내 주민이고 우리가 보듬고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라며 “범죄예방 한국어교실이 더 많이 알려져서 수강생이 더 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어교실이 지역 주민과 경찰이 함께 하는 안산형 시민안전모델이 외국인 사회에 자리 잡게 하는 통로가 됐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손성배 기자 son.sungb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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