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백건우가 회상한 윤정희…“딸 바이올린 연주 속 눈 감아”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아네스의 노래 -영화 ‘시’)
레드카펫의 환호가 가시고 침묵이 흘렀다. 영화 ‘시’(2010)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 양미자가 희생된 소녀를 위해 쓴 진혼시다. 지난 4일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의 시작은 고(故) 윤정희였다. ‘시’는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배우 윤정희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주인공처럼, 고인도 같은 병과 싸웠다.
바이올린 독주 속에 데뷔작 ‘청춘극장’(1967) 등 고인이 출연한 영화들이 소개됐다. 프랑스의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는 딸 백진희(47)씨의 연주였다. 마지막을 함께 한 곡,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였다. 병에 걸려 자신을 잊으면서도 “촬영가야 한다”던 배우 윤정희였고, 딸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턱밑에 바이올린 자국 있으면 딸인 줄 아세요”했던 진희씨다. 이날 진희씨는 윤정희를 대신해 한국영화공로상을 받았다.
다음날 중앙일보와 만난 백건우(77)는 “병석의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진희는 간병 중에 자주 바이올린을 켰다. 마지막 날 아침에도 ‘보칼리제’를 포함해 두 시간 반 넘게 많은 곡을 연주했다. 시상식에서도 가사 없는 노래인 ‘보칼리제’로 말 없는 가운데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원래 피아노 반주가 있는 곡이지만 진희 혼자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영화인 윤정희와 많은 영화제를 함께 한 백건우지만 이번 부산영화제에서는 처음인 게 많았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스무 살 진희씨와 셋이 참석했지만, 이번에는 아내 없이 왔다. 레드카펫에 처음으로 딸의 손을 잡고 올랐고, 아내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대담에 나왔다. 5일 부산 해운대구 CGV센텀시티에서 ‘시’ 특별상영 후 마련된 이창동(69) 감독과의 대담이다. 이날 상영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됐고, 200여 명의 관객은 두 사람의 대담에 귀를 기울였다.
백건우는 “(윤정희의) 영화 인생을 이 작품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며 “‘시’는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라고 했다. 그는 주로 이창동 감독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고, 감독과 관객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병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기 힘들다고 했다. 백건우는 “당시 이창동 감독의 제안을 시나리오도 안 보고 그 자리에서 수락했다”고 돌아봤다.
이 작품으로 윤정희는 칸영화제에 처음 초청돼 단아한 한복 차림으로 레드카펫에 올랐고, 영화제는 이 감독에게 각본상을 안겼다. 이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주인공은 윤정희씨”라고 말했다. 백건우도 “영화 속 ‘미자’와 손미자(윤정희의 본명)는 완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생활고 속에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미자’는 한 여중생의 자살에 외손자가 연루돼 있음을 알게 된다. 지속적인 집단 성폭행으로 동급생을 죽음에 이르게 했음에도 가해자 부모들은 합의금을 걷어 사건을 무마하려 한다.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 손자의 모습에 미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속에 나선다.
이 감독은 “영화 촬영 중 병이 시작된 것 같았다. 젊은 배우들도 힘들어 하는 2분30초 가량의 롱테이크를 한 번 만에 촬영할 정도로 촬영 초 기억력이 아주 좋았는데 점점 대사를 기억하는 것을 힘들어하셨다”고 전했다. 그는 “그렇게 대사를 못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나빠졌는데 어떻게 했을까 여러분들은 생각할 텐데, 그게 윤정희라는 배우가 가진 에너지”라고 말했다.
객석에서 두 손을 모은 채 지켜보던 진희씨가 끝내 눈물을 쏟았다. 부녀는 지난 2019년 “알츠하이머 증상이 10년쯤 전에 시작됐다”고 투병 사실을 공개했다. 윤정희는 데뷔 50주년을 맞은 2016년 “아마 100살까지 살 수 있을까? 그때까지 (영화) 할 거예요. 영화는 인간을 그리는 건데, 인간이 젊음만 있나요”라고 했다. 되짚어 보면 병이 많이 진행됐을 시점이다.
백건우는 “(투병) 전부터 그런 얘기를 해 왔다”며 “(배우가) 천직인 것 같다. 영화를 접할 때 태도가 완벽하게 프로페셔널하다. 그 점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영화와 음악, 서로의 영역에서 상대를 빛내주던 두 사람이었다. 백건우는 남은 삶에서 “하루하루 새로움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싶다. 그게 예술가의 길”이라고 했다. ‘미자’처럼.
부산=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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