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회사, 나는 직원 [김선걸 칼럼]
1996년에 기자가 됐다. 그때는 한 주에 90시간 가까이 일했던 것 같다. 아침 7시 30분쯤 출근하면 아침 보고를 시작으로 쉴 틈 없는 취재, 마감, 개판의 연속이었다. 가끔 조찬까지 만들어 취재원을 만났고 밤늦게까지 일했다. 토요일, 일요일 출근한 주도 숱했다. 선배들이 다 그렇게 사니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누우면 기획, 앉으면 집필, 서면 취재”라던 선배도 있었다. 그렇게 해야 간신히 좋은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이런 직종은 근로시간제를 적용할 이유가 없다. 기자, PD, 작가, 음악가, 미술가, 변호사, 컨설팅, 투자은행 등은 노동의 결과물이 명확하다. 시간보다는 결과물의 퀄리티로 평가해야 맞다.
정보 혁명 시대에 근로시간제는 난센스 같다. 더 많은 시간 일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극단적으로 하루 한 시간만 일하더라도 계약을 따내는 직원, 대박 작품을 쓰는 작가가 대우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시간으로 노동을 재단할 일은 아니다. 물론 건설 근로자나 은행 창구 직원 등 시간 단위로 평가받는 직종도 있다. 그러나 AI까지 태동한 세상이다. 시간제를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건 무리다.
노동의 개념은 달라지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유행하는 ‘은밀한 부업’도 그중 하나다. 몇 년 전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직장서 최소한의 정해진 일만 하는 것)’이 유행이라더니 한발 더 나아갔다. 실제 회사 다니며 부업하는 사람이 꽤 된다. 이런 변칙적 노동의 파생은 경직적인 근로시간제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근로시간제는 업무 외에는 자유 시간이라는 뜻을 함축한다. 자연스레 나머지 시간에는 창업을 하든 알바를 하든 무방하다는 결론으로 수렴한다. 대한민국 헌법 15조에는 ‘모든 국민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돼 있다. 직업 선택이란 전직, 겸업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실제 그런 취지의 판결도 있다. 법이 ‘회사일은 딱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뿐’이라고 정해주니 부업이나 알바를 안 할 이유가 없다. 미국도 비슷한 모양이다. 금융정보회사 뱅크라이트라는 곳에서 조사한 설문에 따르면 세대별 부업 비율이 베이비부머는 20%인 데 반해, Z세대(18~26세)는 53%, 밀레니얼세대(27~42세)는 50%다. 젊을수록 비중이 높다.
회사는 가만있을까? 경영진은 이런 사원들에게는 ‘조용한 해고(Quiet Cutting)’로 대응한다고 한다. 결국 직원이 몸을 던져 일하기도, 회사가 그걸 바라기도 힘든 세상이 되고 있다.
‘오늘도 일이 즐거운 92세 총무과장’이라는 책이 있다. 일본의 1930년생 다마키 야스코라는 할머니 얘기다. 오사카의 한 회사를 66년째 다녀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령 과장으로 등재됐다. 이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독립이나 창업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마음으로 일해왔다(p83).”
야스코 할머니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회사에 몸 바쳐 일했다. 그리고 회사는 그를 93세 넘게 책임진다. 흐뭇한 상생 모델이다. 그러나 이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직원에게는 이직 정보가, 회사에는 채용 정보가 넘치는 ‘다중 선택의 시대’기 때문이다. 결국 선택이다. 어떤 회사는 확실한 보상을 하고 직원은 주인의식을 갖고 일한다. 다른 어떤 회사는 보상이 적고 직원들은 부업을 한다. 어느 쪽을 고를 것인가. 이제 기업의 성패는 회사와 직원이 명확하게 비전을 공유하게 하는 역량에 달렸다. 지금 당신 회사와 직원은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가.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29호 (2023.10.11~2023.10.1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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